여행은 그리움을 실현하는 일이다. 일상에 묻혀 지내다문득떠날 수 있는 건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있어서다. 그리움을 실천할 용기! 그것만 있으면 가능하다.
여행이라고 해서 꼭 국경을 넘거나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가야만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을 벗어나 마음에 품은 그리움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면 된다.
가고 싶었던 곳을 향한 그리움을 현실로 마주하는 순간 떠나오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하게 된다.
몇 년 전부터 라벤더 꽃밭을 보러 남프랑스에 가고 싶었다. 그러다 포털사이트에서 동해와 고성에도 라벤더 축제가 있다는 기사를 봤다. 프랑스까지 가지 않고도 연보라 라벤더 꽃밭에 대한 로망을 실현할 수 있다니 몇 백만 원을저금한 느낌이었다.
동해 무릉별유천지 라벤더 축제
오늘 아침, 일주일 만에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과 브런치를 먹다 남편이 물었다.
"오늘 오전엔 뭐 해?"
"특별한 일 없는데, 글이나 쓰려고."
그러다 문득 라벤더가 떠올랐다.
"우리 라벤더 축제 갈까?"
"어딘데?"
"강원도 동해였던가?"
말하고 나서 같이 웃었다. 딸의 하교 시간에 맞추려면 강원도까지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영종도 둘레길이 생각났다. 전망대에서 바다도 볼 수 있고 코스도 길지 않아 살짝 더운 날씨에 무리하지 않은 산책이다.
영종도 둘레길 1코스 건강 백 년 길
우리는 운서역에서 시작해 세계평화의 숲, 유수지 연꽃단지, 백련산을 거처 다시 운서역으로 돌아오는 가장 짧고 쉬운 코스를 선택했다. 한낮에 31도까지 오를 거라고 해서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차는 운서역 공영주차장에 주차하니 하루 종일 4000원이라 저렴했다.(무료주차장도 있는 걸 나중에 발견했어요.)
입구에 벚나무 숲길이 있는데 빨간 머리 앤이 매튜아저씨를 처음 만나 마차를 타고 그린게이블로 들어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늘 위에 드리워진 벚나무에 벚꽃이 만개하면 앤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것 같은멋진 나무하늘이다. 벚꽃이 만개할 때 다시 오고 싶었다.
중간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친구들 조형물이 있는 장미정원도 있었다. 장미정원 나무 테이블에 앉아 시원한 그늘과 바람을 맞으며 한 번 쉬어 갔다. 이 큰 숲에 우리만 있는 것 같은 여유로움이 좋았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수레국화, 개망초, 토끼풀, 애기똥풀 등 어여쁜 들꽃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요즘은 화려하고 봉오리가 큰꽃보다 작고 소박한 들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있다.
수레국화
개망초
붉은 토끼풀
유수지를 지나니 백련산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보니 조금 겁이 났지만 나는 폭염주의보 때 설악산 울산바위도 등반한 사람이아니던가.
조금 올라가니 백련산 전망대가 있어 바다가 보였다.
영종도에서 바다를 보려면 물때를 잘 맞춰서 와야 한다. 마시안 해변에 바다를 보러 왔다가 진회색 뻘만 보고 돌아간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전망대에서 선나를 맞아준 파란 바다가 고마웠다.
다시 숲길을 오르니 금방 백련산 정상이다. 이건 우리 동네 정발산 수준의 얕은 산이었다. 그래도 걷다 보니 금세 만보가 채워졌다.인생 베프와 얘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걷고 오르니 여행의 그리움도 어느새 다 채워졌다.
운서역에서 차를 타고 마시안해변으로 갔다.
마시안 해변은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왠지 영종도 해변을 멀리 떨어진 신비한 곳으로 만들어 주는 힘이 있는 이름이다. 글쓰기에서 제목이 중요하듯 특별한 이름은 장소를 더멋있게 완성시켜 준다.
마시안 해변 초입에 해물칼국수 맛집인 황해칼국수가 있다. 해물칼국수에 황태가 들어가 국물이 아주 깔끔하고 시원하다. 평일 낮에도 사람이 가득 찼다.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역시 오늘도 진회색인 뻘을 잠시 조망했다.
고려산 산행 이후로 트레킹은 처음 나온 것 같다. 6월 북한산 산행이 한 번 더 남았으니 그때 남겨둔 그리움을 실현해야겠다.
다음 주는 뱅크시 전시회에 가기로 했다. 얼마 전 다녀온 뭉크 전시회도 너무 좋아서 뱅크시 전시도 기대가 된다. 어느덧 6월이 되었다. 나의 2024년 휴직도 4개월째에 접어든다. 매월 등산하고 전시회는 가보자고 결심했는데 이번 달도 슬기로운 휴직생활이 잘 실천될 것 같다. 라벤더 축제가 끝나기 전에 가보는 것도 꼭 해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