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재밌게 봤던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마지막 장면에서 정조 이산은 죽음을 앞두고 그리워하던 덕임과 꿈속에서 재회한다. 두 손을 맞잡은 그들 뒤에 핀 화려한 진분홍 꽃나무가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저렇게 예쁜 진분홍꽃이 피는 나무가 어디 있냐며 분명 조화를 나무에 붙인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우리 학교에 '슈퍼 대디 열"을 촬영하러 온 적이 있었는데 회양목에 노란 나일론 개나리를 붙여 놓은 걸 보고는 드라마 배경 속 꽃들은 사람이 만든 나일론아니면 CG라고 결론 내린 탓이었다.
그러다 올여름 산책 중에 그때 본 진분홍 꽃과 똑같이 생긴 꽃나무를 발견했다.
배롱나무였다.
잘못된 믿음은 시각과 청각의 왜곡을 만든다. 잘못된 신념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진짜일 거라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왜곡된 사실이 사람에게 향하면 오해가 쌓이고 사람에게 당하면 발등을 찍힌다.
류시화 시인의 작업실에 지인이 놀러 와 뱀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자신의 집에 뱀이 없다고 믿었던 작가는 뱀이 아니고 밧줄이라고 했다.지인이 뱀이 맞다며 혀를 날름거린다고 하자 밧줄의 실밥이 풀린 거라고 했다.밧줄이 움직인다고 하자 그제야 확인하고는 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고집스러운 믿음이 눈앞에 보이는 실존을 거부한 것이다.
문유석 작가는 '판사유감'에서 가장 안타까운 상황이
사기를 당했다고 판결을 내려도 피해자가 자신이 사기를 다했다는 걸 믿지 않는 경우라고 했다.
"판사님이 잘 모르셔서 그런데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뭘 잘못 알고 계신 거예요." 라며.
사기꾼이 작정하고 10년 넘게 공을 들여 사기를 쳤으니 속이기 위한 신뢰는 검은 신용으로 둔갑해 할머니를 옭아맸다.
자신이 평생 일군 공장을 하루아침에 날려도 잘못된 믿음은 건강한 진실이 설 자리를 한 평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다른 이의 의견을 수용할 마음이 없는 사람,듣는 척하지만 '너는 떠들어라, 나는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다'라며 철옹성 같은 문을 닫고 있는 사람.
눈앞에 있는 물체를 보고도 착각할 수 있는 마당에 어떤 경로로 갖게 됐는지도 모를 신념에 자물쇠까지 채울 필요가 있을까
나는 가끔 이런 오류에 빠질까 봐 두렵다.
산등성이를 올라가고 있는 인생에서 모양을 바꿀 수 없는 경직된 신념을 짊어지고 한발 한발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아집으로 똘똘 뭉쳐 다른 모양을 만들 수 없는 신념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위해 모양이 변하는유연한 신념이길 바란다.
내 말이 맞다고 우기다가 맞닥뜨리게 되는 민망함이란.
그럴 땐. 나도 한번 찾아볼게 하고 한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지는 모습은 얼마나 보기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