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5km의 힘

by 안태현

어젯밤은 일찍 술자리가 끝나고 회사에서 집까지 걸어가고 싶어졌습니다.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딱 산책하면서 걸어가기 안성맞춤일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회사에서 출발하지는 못하고 서울역에서 출발했습니다. 40분이 줄어서 2시간 50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도 걷기에는 제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신발의 끈을 세게 졸라매고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밤 10시에 산책이라니. 다음날이 쉬는 날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보고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서울역에서 집까지 가려면 용산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너, 노량진을 거쳐야 합니다. 한강대교가 중간지점이니 거기까지 잠시 걷다가 쉬고, 다시 출발을 할 계획을 짰습니다. 서울역에서 한강대교까지의 걸음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오다 보니 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강대교에서 쉬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는 경우는 사진을 찍는다던가, 한강을 바라볼 때 빼고는 없었습니다. 일단 쉬지 않고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했던 생각과, 나아가지 않는 소설의 문장, 살짝 올라오는 취기 등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오르막과 내리막, 평지가 반복되는 거리를 걸으면서 그간 출근길과 퇴근길 때 빠르게 지나쳤던 버스 정류장들이 좋은 지표가 됐습니다. 삶의 흔적들도 그렇게 좋은 지표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걸으면서 정말 많은 사람도 마주쳤습니다. 술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술을 기울이는 사람들, 공부를 마치고 나오면서 지친 사람들,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 등 많은 삶의 궤적들을 만났습니다. 어쩌면 내가 보지 못하고 살아간 많은 인생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노량진부터는 자주 걸었던 길이기에 익숙합니다. 아무런 지표 없이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점점 발의 피로도가 높아집니다. 아무래도 너무 빨리 걸었던 것 같습니다. 이왕 이렇게 걸어버린 것, 같은 템포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선선한 날씨였지만 땀도 맺힙니다. 이제는 운동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주변의 풍경들을 의식하는 경우도 적어졌습니다. 그때부터는 오로지 발을 내딛는 힘에만 집중하고, 목적지까지의 길들만 바라봤습니다. 분명 처음 산책을 결심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이제 그런 걸 의식할 체력도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집 앞 지하철 정류장이 보입니다.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지하철 입구를 배경으로 하고 스마트 워치의 화면을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약 10km를 1시간 50분 동안 걸어왔습니다. 분명 2시간 50분이 걸린다는 네이버 지도의 설명보다 1시간을 단축했습니다. 속도를 계산해보니 약 시속 5km로 걸어온 셈이네요. 일단 집에 들어가서 씻고, 침대에 누웠습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큰 오산. 새벽 4시에 잠을 깨 아침 7시까지 책을 읽다, 다시 잠들었습니다. 두 시간 남짓을 더 자고 일어나서는 바로 컴퓨터를 켜서 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시속 5km로 걸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아가는 것도 걷는 것과 참 비슷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적지로 가야 하는 이유가 가득하지만, 걸어가면서는 그런 생각들이 버려집니다. 주변의 풍경들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지칠 때는 그런 것들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처음의 이유도, 그간의 여유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운 기록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걸어왔던 길들에서 남긴 기록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인데, 일단 자기가 얼마나 빨리 걸었고, 얼마나 힘차게 걸어왔다는 것만 떠오르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일까도 싶습니다. 저 역시 산책을 하려고 했던 의미가 사라진 채, 그냥 공허함만 남기고는 잠이 들었습니다. 간밤에 꿈을 많이 꿨는데, 꿈속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산책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자주 시속 5km의 걸음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분명한 건 복잡했던 생각이 단순해졌다는 것이고, 나아가지 않던 소설 문장의 해법도 찾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건 정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억지로 끊어 내거나, 중단하거나, 무언가를 하는 건 제게 맞지 않는 일 같습니다. 기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제게는 가장 익숙하고, 가장 사랑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걸 또 깨닫습니다. 2시간의 걸음이 꽤 많은 걸 선물해준 것 같습니다. 시속 5km의 힘이 강력하다는 걸 새삼 느끼면서, 오늘은 우선 푹 쉬어야겠습니다. 일단 그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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