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취급 주의
오전 11시 20분, 예약한 시간보다 10분 일찍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님의 파마를 말고 있던 원장님이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어떡하지, 지금 손님이 많은데
저 예약하고 왔는데요? 11시 30분?
아, 11시 반이었어? 1시 반 아니고? 내가 이렇다니까.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이며 턱으로 대기실을 가리켰다. 대기실이라 해봤자 작은 평상 하나가 전부였지만 벽을 등지고 앉아 앞손님들의 파마 진행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당자리였다.
머리에 보자기를 둘러쓰고 앉아 생홍합을 까던 손님이 옆으로 나앉으며 공간을 내주었다. 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대기실에 입실 완료했다.
여기는 나의 단골 미용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겨우 정착한 곳이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솜씨 좋고 가성비 좋은 미용실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몇 년 사이 미용실 물가도 무섭게 뛰었다. 파마 가격이 십만 원을 훌쩍 넘어서고 커트도 냉면보다 비싸졌다. 만원 이하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이곳은 파마 3만 원, 커트 8천 원(학생 5천원). 내 지갑의 구원자였다.
하지만 가격표만 보고 마음을 다 주진 않는다. 추구하는 미적 취향이 일치해야 한다. 나의 별 다섯 개 만점 기준은 '깔끔하면서도 자연스럽게'였다. 요즘 말로 '꾸안꾸' 스타일. 근데 잔뜩 부풀리거나 컬을 확실히 살려서 돈 쓴 티를 팍팍 내주는 '헤어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남의 옷을 입은 듯 어색해서 집에 가자마자 바로 머리를 감기도 했다.
까탈스럽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이집 저집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취향은 돈으로 살 수 없음을 실감하면서.
그러다 이 곳을 만났다. 변두리의 작은 미용실이었다. 보통 헤어 디자이너들이 책자에 나오는 모델처럼 형형색색의 화려한 스타일로 분위기를 압도하는데 비해 이 원장님은 수수한 단발머리로 손님을 맞았다. 한 듯 안 한 듯, 꾸밈없는 모양을 완성해주었다. 가르마를 어느 방향으로 넘겨도 자연스러웠다. 별을 있는대로 다 붙여주고 싶은 집이었다.
간판도 허름한 이 곳을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봤는지, 올 때마다 대기 인원이 있었다. 명절 즈음이나 주말이면 불난 호떡집마냥 손님이 밀려들었다. 그런 날은 예약도 받지 않았지만, 전화를 끊으면서 괜히 흐뭇했다.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기분이랄까.
단골들의 공통점이라면 일단 나이가 많다는 것. 남녀노소 중에 '소'를 빼곤 다 있었다. 여성들은 대부분 빠글빠글 양배추 머리에 진한 눈썹 문신을 하고 있었다. 추구미가 확실하고 노선이 선명한 집단이었다.
오늘도 주변 손님들을 흘깃거리면서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사생활의 경계가 없는 말투와 막내딸을 보듯 격의 없는 눈빛을 감안할 때 평균 70대? 적어도 60대 이상? 속으로 짚어보고 있을 때 비릿한 짠내가 코를 쳤다. 아차, 홍합이 있었지. 미용실에 홍합이라니. 그것도 한 세숫대야 가득, 양이 제법 많았다.
아침나절 시장에서 5천 원 떨이에 파는 거라.
웬 떡이야 싶어서 받아왔는데
일하느라 바빠서 아직 손도 못 대고 있었지.
홍합의 출처는 원장님으로 밝혀졌다. 파마하는 동안 손님이 대신 껍데기를 손질해주고 있었다.
싱싱할 때 빨리 손질해서 데치든가 국을 끓여야지.
양념도 필요 없어.
짭짤한 맛이 절로 우러나거든.
칼칼하니 땡초 몇 개 썰어 넣고 잔파 있지?
나중에 한 주먹 갖다 줄까?
두 식구 먹기는 한정없다.
숟가락 개수까지 꿰고 있는 걸 보니 단골 이력이 최소 10년은 넘은 듯 했다. 서로를 언니나 형님 또는 동생으로 불렀다. 그중 누군가 TV 채널을 돌리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에서 멈추었다. 대화에 장단이 실렸다.
잘한다~
쟤는 뜨기 전에 고생을 엄청 많이 했다네.
지하 단칸방에 살다가, 지 엄마는 무슨 복을 타고 나서,
아, 형님, 내가 우리 아들 새 아파트 이사 간 얘기 했던가요?
이제는 서로의 자식 이야기로 흘러왔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얇은 가운을 입고 앞자리에 앉았다. 원장님이 굵은 웨이브 파마를 말아주셨다. 어르신들의 다정한 눈길이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오마나, 젊은 새댁이 곱기도 하지.
우리는 만날천날 빠글빠글 볶는 것만 해봤지, 저런 거는 꿈도 못 꾸는데 참말로 곱다 고와
거울 속의 내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오십 줄에 접어든 이후 어딜 가든 나이 때문에 안된다, 늦었다는 소리만 듣다가 새삼스러웠다. 열없이 기분이 좋았다. 나이 먹어도 젊어보이고 싶으면 어르신들 계신 곳으로 가면 되는구나.
탱글탱글해진 라면머리 어르신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미용실엔 원장님과 나, 둘만 남았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던 그녀가 모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의자에 앉아 보는 듯했다.
문득 궁금했다. 일하신지 얼마나 됐을까? 잠시 말을 머금고 있던 그녀는 담담하게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용한지 47년쯤 됐나?
그때는 시집가면 바로 그만두려고 했어.
근데 남편 혼자 벌어선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우리 집 살 때까지만 가위를 들자 했지.
당시 집 한 채가 3천만 원이었거든.
3년 동안 밤낮으로 열심히 파마를 말아서 돈을 모았어.
근데 웬걸, 3년 뒤에 집값이 배로 껑충 뛰어버린 거야.
3천만 원으로는 택도 없었지.
정신 차리고 보니 애들은 커가고
남편이 7형제 중 막낸데
그중 우리가 제일 가난한 거야.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근데 우리 애들이 사촌들보다 쳐지는 건 못 보겠더라.
잘 키우려면 뭘 해야 될까 생각했지.
좋다, 그럼 우리 애들은 교육에 집중투자를 해보자.
그때부터 손끝이 닳도록 파마를 말아서
학원비를 벌었다.
가진 거라곤 미용기술 밖에 없잖아.
그게 30년, 40년 넘어 이날까지 온 거라.
덕분에 남매는 세상에서 제 몫을 해내며 살고 있고 내집 마련의 꿈도 이루어졌다. 3천만 원을 목표로 했던 그녀는 어엿한 건물주가 되어 있었다. 살림집이 달린 이 점포가 본인 소유였다. 그럼에도 가위를 놓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나이 먹도록 찾아주는 단골이 있으니까.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어깨가 쑤시고
무릎도 아파.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아까 그 형님들 봤지?
멀리서 찾아오는데, 생각하면 고맙잖아.
어느 새 굽슬굽슬 자연스러운 펌이 완성되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풀 죽어있던 머리칼이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47년을 갈고닦은 노하우가 돋보였다. 그럼에도 다른 미용실보다 저렴하게 받는 이유는 월세 부담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몇 십년째 가격 동결이라고.
고약한 파마약 냄새를 참아가며 손가락에 지문이 닳도록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세월이 고마웠다. 덕분에 내 지갑도 거품을 털어낼 수 있었다. 파마 소요시간 2시간 30분, 유지기간은 앞으로 석달 정도. 이만하면 가성비 오만 오천 점은 거뜬하지 않을까.
단돈 3만 원을 계산하고 돌아섰다. 유리창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자식들 잘 키워보겠다는 일념으로 평생 가위를 놓지 않았던, 어여쁜 새댁이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