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주의
4년 전 오늘 아침, 전화기에 폭탄이 떨어졌다. 발신자는 엄마였다.
"나야, 할머니가 위독하셔!"
(여기서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 즉 나의 외할머니를 칭한다.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굳이 구분하고 싶지 않아 '할머니'로 쓴다.)
전화를 끊고 병원까지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도착해 보니 할머니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거죽만 남은 손이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담당의가 사망선고를 했다. 의료진들이 후다닥 와서는 그녀의 몸에 연결돼 있던 의료장치들을 걷어냈다.
공식적인 사망선고가 내려졌지만 어쩐지 나는 할머니가 듣고 계실 것만 같았다. 인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소멸하는 것이 청력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무토막 같은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을 때 빨리 말해야 했다. 덕분에 행복했고 고마웠고 사랑한다고, 말할 때 목안이 맵고 뜨거웠다. 그녀는 엷은 미소를 띤 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남은 건 몇 가지 병원 수속들이었다. 정산을 위해 1층 로비에 대기했다. 창밖에선 하얀 벚꽃 이파리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저 꽃잎처럼 그녀도 허공을 밟고 있을까. 미련 없이 떠나는 생과 희망에 떨며 눈뜨는 생이 교차하는 계절. 자연의 섭리란 이토록 오묘하고 섭섭하고 매정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 해마다 벚꽃이 피면 그녀를 향한 그리움도 피어난다.
그녀는 어느 고을 원님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뼈대 있는 가문에서 가난을 물려받은 원님은 막내딸을 소문난 부잣집에 시집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시아버지가 술독에 빠져 살림을 탕탕 말아먹은 탓에, 후대에서는 겨우 밥술이나 뜨고 살게 되었다.
농사 외에 딱히 벌이가 없던 시골에서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남의 집 일을 다녔다. 지금으로 치면 맞벌이였다. 부지런하고 손이 야문 그녀에겐 스카웃 제의가 쇄도했다. 이웃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줄을 섰다. 당연히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집안일이 목을 빼고 기다렸다.
하지만 원님의 딸은 비록 부뚜막에서 찌그러진 국자로 숭늉을 퍼도 기품이 있었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모습이나 언동에서 품위를 잃은 적이 없었다. 김치를 찢은 손가락을 다시 입에 넣고 쪽 빨아먹거나, 화장실을 나와 바지춤을 추켜 올리지도 않았다. 사탕을 아작 깨물어 남은 반쪽을 손녀 입에 넣어주는, 다른 집 할머니들이 서슴없이 하는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곁에 있으면 고상한 기운이 스미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할머니라서 든든했다.
나의 유년기는 온통 그녀와 함께였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소풍이나 운동회, 학예회 등 모든 학교 행사에는 할머니가 자리했다. 그런 날엔 아주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꽃은 그녀가, 비취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날듯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당시엔 소풍날도 학부모가 참석해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젊은 엄마들이 색색깔의 속재료가 꽉 찬 김밥 도시락을 흔들고 나타났다. 그녀와 나는 한적한 바위 뒤편이나 나무 둥치를 찾아갔다. 도시락 뚜껑을 열면 흰밥에 김치나 콩자반이 들어있었다.
집에서 늘 먹던 반찬이라 나는 아무렇지 않게 잘 먹었다. 다른 애들이 어떤 김밥을 싸 오는지 몰랐기에 그랬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녀는 소풍날 맨밥 먹는 손녀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당하지 않게 지켜주고 있었다.
운동회 날은 펄럭이는 만국기처럼 마음이 팔랑거렸다. 달리기를 하면 3등까진 결승점에서 도장을 찍어주었다. 공책이나 연필 등의 학용품을 선물로 줬다. 나는 한 번도 손목에 도장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 운동신경이 꽝이었다.
그래도 마칠 땐 공책 한 두 권은 항상 들고 왔다. 할머니가 따주신 상품이었다. 학부모 달리기를 할 때 그녀의 발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3등 안에 들었다. 비취색 한복을 입은 그녀가 운동장을 날아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가장 하이라이트는 방학 때였다. 방학이 되면 그녀와 나는 도시로 나갔다. 터미널에서 버스에 오르기 전, 항상 챙기는 세 가지가 있었다. 멀미약과 비닐봉지, 구운 쥐포. 평소 버스라곤 탈 일이 없었던 우리는 차멀미를 심하게 했다. 휘발유 냄새만 맡아도 침샘이 울렁거렸다. 멀미약을 마셔도 가다 보면 다급하게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그렇게 속이 메슥거릴 땐 구운 쥐포가 특효였다. 특유의 고릿고릿한 냄새가 신경안정제 역할을 했다.
먹다 남은 쥐포를 들고 도착한 곳은 그녀의 아들이자 나의 외삼촌 댁. 그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차지하고 명문대를 졸업, 대기업 임원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 엘리트 아들을 둔 어머니로서, 그녀는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뿐인 딸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친정으로 돌아온 것이다. 혹까지 하나 달고서. 수군거리기 좋아하는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입방아를 찧어댔다. 할머니의 반응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였다. 그리고 혼자된 딸을 다독이며 나를 키워주셨다. 할머니에게 울 엄마는 아픈 손가락이었고, 그 아픈 손가락에 달린 손가시가 바로 나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방학 때마다 그녀가 아들 집에 갔다는 사실이다. 그 집엔 아들 내외와 떡두꺼비 같은 손자 3명, 도합 다섯 식구가 살았다. 그리고 시골에선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우선 피아노와 소파가 있었고 냉장고엔 초코 우유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비리지도 않고 달달한 우유가 있다니! 사흘동안 초코 우유만 골라먹다 그 집 막내랑 멱살 잡고 싸운 적도 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이나 동화전집, 백과사전 등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은 눈이 부셨다. 시골 학교 도서관보다 책이 많았다. 표지에 흠집 하나 없는, 새책들이었다.
그런데도 사촌들은 심드렁한 눈치였다. 생전가야 책을 꺼내 읽는 꼴을 못 봤다. 저 많은 걸 설마, 벌써 다 읽었나? 나로선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사흘 내내 방구석에 틀어박혀 책만 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길눈도 어두운 시골 아낙이 방학 때마다 낯선 도시의 아들 집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찾아간 이유는 왜였을까? 굳이 멀미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불편한 여정을 반복했던 이유는, 어쩌면 촌뜨기 손녀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어디서나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셨다. 언젠가 그녀가 아프시단 연락을 받고 시골집에 갔을 때였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나야, 니가 내 보물이다."
지금도 그 말을 붙들고 산다. 빛을 잃어갈 때, 그 말이 나를 다시 살려낸다. 힘들어도 바닥까지 보여주진 않으려고,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녀처럼.
인생의 고비를 만났을 때,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면 길이 보이기도 한다. 아픈 손가락이 기죽지 않고 살아가도록 온기를 불어넣어 준 사람. 내 인생엔 천사가 다녀갔다.
그리고 여전히 고속버스터미널을 지날 때, 건어물 가게 앞을 지나거나 김밥을 먹을 때도 할머니가 보고 싶다. 나는 그녀가 남겨준 세상을 살고 있다. 비취색 하늘 아래 벚꽃이 흩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