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걷다 문득
흙내음 섞인
나의 시간들을 맡으며
깨닫는다
나무에 매달린 열매처럼
내가 익어가고 있음을
외로움이라는 단어 앞에
더는 파르르 떨지 않는다
속상함 대신
고요한 헤아림을
마음 안에 스며들게 두었다
버티는 힘보다
볕살같은 기다림을 배웠고
감추던 벽을 허물고
내면의 깊은 우물을
말없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제는 안다, 익는다는 건
무르익는 달콤함보다
뜨거운 햇살 견디며
단단한 씨앗을 품고
제 빛깔을 깊이 채워가는 일임을
오랜 세월 함께한
들판의 풀잎처럼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바위처럼
말 없는 존재들과도
닮아가는 일임을
그리고 가끔은
낡은 껍데기 같은 아집을
스스로
고요히
벗겨내야 한다는 것도
나라는 열매는
오늘도
늦지 않게
제 속을 익히며
빛으로 여물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