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갑은 아마 부모님이 주신 제 생일선물이었을 거예요. 2017년 7월 정도였는데, 그때 저는 군대에 있었어요. 저한테 군대란 뭔가 쓸모없는 물건을 가져다가 쓰는 장소였기 때문에 새 지갑을 별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군대 나오고부터 이 지갑을 쓰기 시작했죠.
한번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윤석 님 헤어 스타일이 한결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웃음)
이 사진이 고등학생 때인데, 저는 외모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머리에 관심이 없어요. 스타일 변화를 두려워하는 걸 수도 있고. 그리고 제 머리가 약간 반곱슬인데, 직모가 아니라서 좀 많이 튀어요. 이걸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진지) 그래서 그냥 단정하게만 놔두자 그런 거였는데 아직도 이러고 있네요.
이때 설명을 더 해보면, 고등학교 때까진 정말 공부만 했어요. 그때도 지금의 제 취향이 어느 정도 있었던 기억은 나는데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고 그냥 공부만 했어요. 그래서 머리가 이 모양이고.
왜 공부만 했던 것 같으세요?
자사고였고,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말을 항상 주위에서 듣기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어렴풋이 기자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좀 현실을 모르고 하는 생각이긴 했지만, 영웅적인 행동에 매료되어 있었거든요.
에드워드 머로라는 기자가 있는데, 텔레비전 저널리즘을 완전히 열어젖힌 미국 사람이에요. 그분이 뭘 했냐면 두 가지 사건으로 유명한데, 하나는 2차 세계대전 때 종군기자로 취재를 나가서 폭격이 떨어지는 와중에 건물 위로 올라가서 그걸 생방송을 했어요. 폭격을 생방송한 거죠. 그 점이 되게 용감하고 놀라웠어요.
그다음 하나가 매카시즘(1950~1954년 미국을 휩쓴 일련의 반공산주의 선풍)에 정면으로 대항한 거예요. 이 머로라는 분이 텔레비전을 이용해서 매카시즘은 잘못되었고, 매카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직접 나와 반론하라고 주장하면서 매카시즘의 몰락이 시작된 거죠.
그 두 행동에 감명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한번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그 사람처럼 기자가 되려면 좋은 학교에 가야 되잖아요. 그게 공부를 열심히 한 원인이었죠.
정의감이 투철하셨군요. 공부만 했던 것에 대한 후회는 없으세요?
있죠. 군대에 있었을 때부터 뭔가 예술적인 것들, 그니까 글, 영상, 춤, 노래 같은 것을 창작하는 일에 굉장히 매료되기 시작했어요. 그런 재능 한 가지를 가져보고 표현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걸 고등학교 때 못해본 게 아쉽네요.
그다음에,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대한 굉장한 아쉬움이 있어요. 제 생각을 말하고 글로 적는 그런 일들이요. 저 고등학교 때 세상이 완전 난리가 났었잖아요. 중심에 세월호가 있었고, 국정교과서를 만든다고 해서 한번 난리가 난 적도 있었고요. 그런 거에 대해 나는 말을 하고 싶은데,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뭔가 묵살당할 것 같은 느낌이었던 거예요. 그때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아쉬워요.
되게 공감이 많이 되네요. 한국 사람들이 고등학교 때 이루기 힘든 두 가지인 것 같아요. 혹시 이렇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모르겠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 번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음... 저는 어릴 때 텔레비전을 되게 자주 봤어요. 아직도 디지몬이 텔레비전에 나오던 때를 기억하고, 뽀로로 1회를 생방송으로 보기도 했어요. 뽀로로가 시작하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본 세대인 거죠. 아무튼, 제가 어릴 때는 할아버지랑 같은 방을 썼는데 저희 할아버지께서 뉴스를 자주 보셨어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부터 뉴스를 굉장히 많이 봤어요. 기억나는 뉴스가 9.11 테러, 월드컵, 대구 지하철 참사... 그다음에... 노무현 대통령 당선도 있었어요.
(매우 놀라며) 그게 다 기억이 난다고요? 너무 신기한데요.
제가 쓸데없이 기억을 좀 잘하는 건지. (웃음) 정말 정확하게 기억이 나요.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경우는, 그 뉴스를 본 게 초등학교 들어가기 1~2주 전이었어요. 초등학교에 대한 기대가 많았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관심이 그 일로 다 쏠렸었어요. 어떤 뉴스가 나왔는지도 기억해요. 최근에 생각이 나서 다시 뉴스 영상을 찾아보니까 MBC 뉴스데스크였고 화재 발생의 원인과 확산 과정에 대한 미니어처 실험 내용이었어요.
그 미니어처에 불이 들어오는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요. 저는 그 당시에 처음으로 생명의 공포를 느꼈고, 그 직후에 소화기에 굉장히 집착했어요. 불이 나서 내가 타 죽을지 모른다는 그런 기분이었죠.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떼를 썼고 할아버지가 며칠 뒤에 소화기를 사 오시더라고요. (진지)
소화기를요? 진짜로요? (웃음)
그 소화기는 저희 집에 10년 동안 있었는데, 다행히 한 번도 쓸 일이 없었죠. 하여간 옛날부터 사회적 이슈들을 접했고, 영웅적 행동 같은 것에 매료되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아닐까요.
남들이 나를 봐줬으면 하는 욕구가 컸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무대에서 말을 하면 사람들이 최소한 저를 보니깐요.
이건 이화여대 영문학과에서 했던 연극 입장권이에요.〈indecent〉라는 제목이고, 실제로 공연되었던 한 연극의 발자취를 그리면서 유태인과 레즈비어니즘에 대한 고찰을 담은 연극이었어요.
연극에도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연극에 정말 관심이 많아요.
언제 연극에 빠지셨어요?
맨 처음 매력을 느꼈던 가장 확실한 기억은 고등학교 때에요. 심심하면 교과서를 가끔씩 읽어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문학 교과서를 읽다가 대본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봤던 대본 두 가지가 이근삼의〈원고지〉랑 브레히트의〈사천의 선인〉이었어요.
〈원고지〉는 직접 연기를 한 적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이걸 앞에 나와서 연기해 볼 사람이 있냐고 그러셨는데 제가 바로 하겠다고 했죠. 반 앞에 나가서 혼자 연기를 했는데 진짜 재밌었어요.
와··· 거기서 혼자 연기를 하기 쉽지 않은데.
그냥 국어책 읽듯이 읽으면 재미없잖아요. (웃음) 아무튼 그때부터 재미를 느껴서 도서관에 가서 책 찾아서 읽고 하던 게 지금까지 왔네요.
작가명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보통 연극을 직접 보러 가서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극본을 먼저 접하면서 관심을 가졌다니 신기해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극본을 읽으면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어서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읽었던 극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뭔가요?
아서 밀러의〈시련〉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매카시즘에 관한 내용이에요. 혐오감이나 공포심에 젖어서 맹목적으로 남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비판하고자 만들어진 작품이에요. 후반부에 보면 주인공이 절규하다시피 항변하면서 감정이 굉장히 폭발하는데, 그게 극본을 읽으면서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극본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꼽자면 이 작품이 최고인 것 같아요.
혹시 대학교에서 연극 관련 동아리 같은 것도 해본 적 있으세요?
계속했었어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는 학부 내 연극 소모임에서 배우를 했었고, 군대 다녀온 후에는 좀 더 규모가 큰 학부 연극회에서 배우로 활동했어요. 그때는 연출보다 연기하는 게 훨씬 좋아서 배우만 했었어요.
남들이 나를 봐줬으면 하는 욕구가 컸었
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 무대에서 말을 하면 사람들이 최소한 저를 보니깐요. 근데 줄곧 배우였으니까 요즘은 다른 게 하고 싶어요. 창작이나, 연출이나, 기획이나 무대···.
다음 화에서 계속.
다채 1호는 인터뷰이의 지갑을 통해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각자의 크고 작은 다름이 어우러지는 다채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Instagr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