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이었다.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복권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복권집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인데 그날은 경찰서를 지나쳐 가는 길을 선택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이 빨리 어두워서 7시만 넘으면 어둠이 온 동네를 가득 채웠기에 조금이라도 큰길로 갔다 오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내 특기 중 하나가 걷기, 그중에서도 빨리 힘차게 걷기인지라 그날도 나는 빠르고 힘차게 복권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복권에 당첨되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달콤하고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서 말이다.
경찰서를 지나가는데 쥐색 모닝이 경찰서 주차장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가 보다 했다. 아니,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더니 주차하고 있던 쥐색 모닝에서 들리는 거였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경찰서에 주차를 하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던 것이다. 창문을 내리고 운전을 하고 있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바깥에까지 퍼져 나왔다.
나는 걸음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뒤돌아봤다. 주차를 가까스로 마친 여자는 경찰서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서 아줌마의 표정도 소리도 듣지 못했지만 필경 소리 내어 울면서 경찰서로 들어갔을 것이다.
저 여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여자의 아들 혹은 딸은, 어쩌면 남편은 경찰서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여자의 가족은 사건을 일으킨 사람일까 사건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일까.... 어떤 경우라도 여자가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가 알게 된 사건은 여자를 슬프게 만들 것이다.
내가 흐느끼며 경찰서를 찾아가는 여자를 그냥 지나치치 못했던 건 나의 기억이, 두려움과 불안함에 떨고 있었던 나의 일 년 전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날도 남편은 받아야 할 돈을 받기 위해 부산에 갔다. 이상했다. 남편에게는 항상 받아야 할 돈이 있었지만 실제로 받는 돈은 별로 없었다. 남편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돈을 좇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곳저곳에 사정을 했지만 실질적 소득은 거의 없었다.
그날 남편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다.
돈을 지급받기 위해서는 세금을 내야 하는데 세금낼 돈이 없다고 했다. 세금만 내면 한 시간 안에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또, 다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무조건 믿고 보는 호구 같은 특성을 짙게 타고난 지라 남편에게 세금을 일단 내라며 돈을 입금해 줬다.
그달의 내 월급과, 내 생명보험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서 말이다.
남편은 그 돈을 받아 누군가에게 줬고, 결국 남편이 원하던 돈은 받아내지 못했다.
남편은 그날,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식의 말을 끝으로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전에도 남편은 그만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그런 류의 비관적인 말을 한 후 연락이 되지 않은 날들이 많이 있었고, 그런 수두룩한 날의 밤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달리는 트럭에 뛰어들 수도 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남편의 목소리가 절망적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두려웠다.
나는 119인지 112 인지에 신고를 했다. 남편이 죽을 것 같다고...
바로 경찰서에서(내가 복권집을 가면서 지나친 그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조사를 나왔다. 나는 아이가 놀랄까 봐 집이 아닌 주차장에서 경찰들을 만나기로 했다.
경찰차는 빨간 경보등 불빛을 반짝이며 지하주차장 1층에 있었다.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경찰차 안에 들어가 경위를 말했고, 경찰들은 상황을 들은 뒤 부산 경찰이랑 공조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경찰차에서 젊은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집에 올라온 후 밀려드는 온갖 무서운 생각들 때문에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위해 연기를 해야 했고, 남편이 죽는다면 그 이후에 나와 아이에게 닥칠 일들, 내가 빠르게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떠올리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몇 시간 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은 죽지 않았다.
죽을까 고민은 했었다고 했다. 남편에게 그런 고민이야 허구한 날 있는 것이었지만 그날은 실행 직전까지 갔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남편은, 죽지는 않았다.
나는 경찰서를 지나칠 때마다 그때 일이 떠오른다. 경찰차가 주차장에서 빨간 경보등을 반짝이며 서 있던 모습, 내가 경찰차 안에서 남편과 관련된 일들을 소상히 경찰관에게 말하던 모습, 그리고 두려움에 떨던 나의 모습.
경찰서에 들어가는 중년의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그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 여자가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은, 특히 나처럼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은 경험한 만큼만 느낄 수 있다. 경찰서에 들어가는 여자의 사연을, 그 이야기를 알 수 없으나 그 두려움만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일을 경험해 보았으니까 말이다.
이름을 모르는 그 중년 여인에게 일어난 사건이 부디 그 여인의 삶을 뿌리째 흔드는 그런 슬픈 일은 아니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제 저녁에, 잠들기 전 아이와 침대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아이는 팀 마샬의 <지리의 힘>을. 그날 회사에서 오케스트라 연수를 듣고 온 참이라 나는 한껏 감성이 치솟아올라 있었고, 아이는 자기가 엄마 책을 읽는다는 것에 한껏 어깨가 으쓱해져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자고 했고 아이는 동의했다.
먼저 아이가 유튜브로 위풍당당 행진곡을 틀며 중간 부분의 웅장한 느낌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안드레와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틀어주며 그럼 이 노래도 좋아할 거라고 말해줬다. 우리는 가브리엘 오보에와 베토벤 연주곡도 조금씩 들었다.
음악을 고르느라 책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평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화롭고 따뜻하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존재하지 못할 순간들이었다.
남편과 함께하는 삶은 미친 듯이 스펙터클 하다. 에버랜드의 티 익스프레스를 타는 느낌이다. 저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나 싶다가도 언제나 추락을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올라갈 때에도 한껏 긴장되고 불안하다. 추락은 말할 수 없이 빠르다.
나는 티 익스프레스를 탈 때마다 눈을 감는다.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 게 무서워서 말이다.
남편이 없으면 쓸쓸하다. 그렇지만 평온하다. 아이와 나만 있으면 우리는, 평지를 걷는 느낌이다. 천천히.
나는 더는 티 익스프레스를 타지 않는다. 불안하고 무섭다.
더는 긴장된 상승도, 끝간 데 없이 이어진 추락도, 감당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