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인 엄마 집엔 냉장고가 세 대 있다. 양문형 냉장고, 뚜껑형 김치 냉장고, 냉동고.
그 안에 들어있는 출처 모를 식량들 중 상당량이 화석화되어 섭취가 불가능해 보인다.
강산이 네댓 번 변했을 세월 동안 모은 옷은 또 어떠한가. 엄마가 지금의 젊은 세대들만큼 급변하는 유행에 민감하지 않다고 해도 70년대 잡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옷들이 태반이다. 유행은 돌고 돈다, 복고 패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한다는 엄마의 믿음 하에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옷더미들. 그중 몇 벌은 엄마한테 건네받았다가 도저히 입을 수 없어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간 것도 있다.
가수 지드래곤처럼 시대를 넘나드는 패션 센스가 내게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엄마와 함께 꾸역꾸역 같이 살아가는 물건들을 보면서 어쩌면 엄마는 버리지 못한 것들로부터 위안을 얻고 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엄마에게 저장 강박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모습이 갑갑하기는 했지만 내 삶이 아니고, 내 공간도 아니므로 주제 넘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엄마는 죽을 때까지 엄마 손때가 묻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작년 겨울, 엄마의 얼굴과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병원에 찾아가 검사를 받은 결과, 간수치가 정상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엄마의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즉시 치료받지 않으면 간성 혼수가 나타나 위독한 상태에 빠질 수 있으니 그날로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충격을 받은 엄마는 자청해서 가족 면회도 되지 않는 병실로 들어갔다. 흑색으로 변해 가는 얼굴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독한 스테로이드와 혈장을 투여받고 저염식을 먹어야 하는 고된 입원 생활이 2주 가까이 이어졌다.
신정이 되기 전에 퇴원한 엄마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한동안 집에서 쇠한 몸을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몇 주 후, 식욕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나는 신나게 반찬 몇 가지를 만들었다. 염분을 최소화해 나물을 무치고, 신선한 소고기와 메추리알을 잔뜩 넣어 장조림을 만들었다. 푹 끓여 사골국처럼 뽀얘진 황탯국까지 한 데 싸 가지고 익숙하게 엄마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와, 딸."
현관에서 나를 맞이한 사람도 엄마가 맞고, 내 손에 있는 음식 보따리를 받아 든 사람도 엄마가 분명한데, 이곳은 내가 아는 그 집이 아니었다.
"엄마,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