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Feb 16. 2024

바쁜 척하던 때가 좋았다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던 때가 좋았다

고백하자면 중간고사 때는 바쁜 척을 했던 것 같다. 사실 대학에 와서 그렇게 바쁘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정말 바빠지니까 이제는 바쁘다는 생각조차 하기 쉽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숨 가쁘게 해치울 뿐이다. 요즘은 나무를 보는 여유, 하늘을 보는 여유를 잃어버렸다.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예전처럼 오래 바라보진 못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만 급하게 찍고는 다시 손을 녹이면서 걸어간다.


그런데 지난 이틀 동안은 학기가 다 끝난 것 마냥 방에 누워 있기만 했다. 그저께가 신입생 수시 면접일이라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는데, 학교에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그날부터 마음이 스르르 풀렸던 것 같다. 그날 새벽 5시 즈음까지 카페에 있다가 자취방에 돌아와서 쪽잠을 잤다. 모처럼 쉬는 날 같아 좋았다. 수업 시간에 맞춰 겨우 일어나서 수업을 듣고는 바로 노트북을 덮었다. 그렇게 누워 있다보니 이틀 동안 자취방에서 한 발짝도 안 나갔다. 왜 그랬을까. 시험 준비도 보고서 작성도 하려고 이것저것 다 계획했었는데, 이틀이나 시간을 날려버렸다. 역시나 시험 기간은 마음 같이 흘러가지 않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내 마음 같이 흘러가려나.


학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니 미래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는 것 같다. 시험 공부도, 과제도 조금 고통스럽긴 해도 다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변함없이 힘들다. 막상 시작하면 재미있다고 느끼는 순간도 물론 있지만, 그런 순간을 몇 번 겪고 나서도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는 건 여전히 어렵다. 대학원에 가게 되면 이 생활을 10년 더 해야 한다. 나는 철학이 좋고 미학이 좋은데, 이게 직업이 되는 삶은 어떨까.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가 너무 어렵다.


방학이 되면 책을 많이 읽고 싶다. 다른 목표는 없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좋은 책들을 읽고 싶다. 꼭 철학이나 미학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흥미가 생기는 책이라면 뭐든 좋다. 셔틀버스 타고 도서관 가서 책 읽다가 저녁이 되면 놀러가고, 가끔은 서점도 가고 싶다. 이번 겨울은 책 속에서 살다 나오고 싶다.


이런 공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아직까지 충분히 바쁘진 않은 것 같다. 다음 주 금요일에 첫 시험을 치르고 나면 종강일까지의 2주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갈 것 같다. 그냥 다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시험 못 봐도 좋고 보고서도 잘 못 써도 좋으니, 그냥 끝나기만 해라. 다시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2023. 12. 03.

새벽, 집 앞 카페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