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강사의 까랑까랑한 중국어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과 몸이, 꿀꿀거리는 돼지의 영상과 한데 어우러져 말하는 돼지 같다는 엉뚱한 상상이 들었다. 박 교수가 왜 바로 대꾸를 안 하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말하는 돼지는 신이 나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왜 ‘다 지워버려라!’라고 무섭게 화를 내지 않고 ‘지워줄래?’라고 부드럽게 말한 겁니까? 홍홍.”
“네?”
페미니즘 강사는 이미 그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 즐거운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의 말미에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그녀의 비웃음이 박 교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것을 얼른 지우려는 듯 여권운동가 교수가 말을 낚아챘다.
“이 상황 이전에 다른 얘기는 뭐가 없었던가요?”
이른바 대화를 확장시켜 주제를 흐릿하게 돌려버리는 상당히 고급화된 듯 보이지만 너무 오래된 촌스러운 기술을 그녀는 구사했다. 그녀의 그런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페미니즘 강사는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듯이 투덜거렸다.
“학생이 알아듣게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구요.”
그렇게 혼잣말이 사그라들기도 전에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녀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왜 ‘이제부터 그럴 일 없을 거다.’라는 말을 했습니까?”
계속해서 돼지는 박 교수가 제대로 학생을 혼내지 않았다는 쪽으로 주제를 확고하게 돌렸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박 교수는 그 와중에도 속으로 생각했다.
‘이 자리는 내가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엄격하게 혼내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이 돼지야!’
하지만 그의 생각은 차마 혀를 타고 밖으로 터져 나오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이 학생이 뭐라고 받아들이겠습니까?”
강한 경상도 악센트로 페미니즘 강사의 중국어를 다시 통역한답시고 한국어 통역이 박 교수의 귀에 대고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나는 ‘이제까지 말한 거 지워줄래?’라고 물은 거고, 그 대답으로 이 학생이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대화 내용을 보면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미 저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겁니다.”
“왜 이게 학생이 교수님을 좋아한다는 대화라는 겁니까?”
페미니즘 강사가 계속해서 따지고 들었다.
“왜 이 학생을 계속해서 조교로 썼습니까?”
같은 질문을 계속 쏘아대듯 하면서 박 교수가 대답을 못하는 것이 자신의 촌철살인에 의한 것이라고 착각했는지 페미니즘 강사가 계속 물고 늘어졌다.
“나 같으면 벌써 화내고 잘라버렸을 텐데, 왜 이 학생에게 ‘고마워.’라고까지 했습니까?”
‘이런 논쟁이 무슨 소용일까?’
대꾸해봐야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언뜻 시계를 봤다. 8시 40분. 이미 조사가 시작된 지 1시간 40분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학생의 틀린 한국어 표현을 고쳐줄 때입니까? 학생의 잘못된 행동을 혼내줘야지?”
이미 본 건은 물 건너간 지 오래이고, 페미니즘 강사는 혼자서 신나서 10여분은 똑같은 논리를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융단폭격 같은 것을 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20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던 조교가 있었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죠?”
듣다못해 박 교수가 다시 대답했다.
“20여 년 전의 서른이나 된 친구가 조교에게 ‘교수님은 뭐든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라고 했었는데 그 말은 나를 정말로 걱정해서 했던 말이다. 그런데 너는 이제 겨우 스물 조금 넘은 녀석이 나에게 그따위로 말하다니 어떻게 그러냐라고 비꼬듯이 말한 겁니다.”
구체적인 반격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페미니즘 강사가 움찔하다가 다시 밀어붙였다.
“‘그래도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면 다 괜찮은 거 아닙니까?”
그 와중에도 박 교수의 머리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게 성희롱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들은 이렇게까지 궤변을 토해가며 여학생을 변호하고 나서지? 돼지는 계속해서 왜 그 자리에서 무섭고 더 무섭게 학생을 몰아치지 않았냐고 따진다. 도대체 돼지는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것일까? 내가 화를 내고 그녀를 자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그녀를 잘라버렸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타임머신 식의 후회를 하자는 것인가?’
박 교수는 뭔가 그 상황에 대해서 본 사안과 관련해서 제대로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처음에 왔던 대학원생이 조교를 하겠다고 했는데 3월 8일까지 신청서를 내야 한다고 해서 냈는데 3월 19일에 그 학생이 돈도 안 되고 힘들기만 할 거라고 투정 부리고서는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츠리엔 학생을 조교로 대신하겠다고 학과 조교에게 말했고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츠리엔 학생에게 돈을 지급해달라고 했더니 학과에서 돈을 지급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 학생까지 잘라버리면 나는 어떤 학생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만약 이 학생을 잘라도 다시 다른 학생을 조교로 고용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나의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츠리엔 학생은, ‘제가 아니면 누가 교수님을 도와드릴까요?’라는 프레임을 이용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보수도 받지 않으면서 그녀는 왜 조교를 지속했을까요? 그게 핵심인 겁니다.”
박 교수의 상황 정리에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준비한 듯 남자 조사위원장이 치고 나왔다.
“학생이 교수를 맞먹는 듯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 학생이 교수님을 좋아했다는 증명이 됩니까?”
이번에는 박 교수도 논리를 흐리는 것에 짜증이 북받쳐 올라오면서 맞받아쳤다.
“존중하냐 안 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학생이 나를 어려워하거나 우리가 권력관계에 있어서 그 학생이 내키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권력관계 성립의 근거가 무너진다는 말입니다. 특히, 학과의 농간으로 월급도 받지 못하면서 어려워하지도 않는 권력관계라는 것을 이 라인 대화와 조교 사건이 증명할 수 있다면 그녀가 무엇을 위해서 계속해서 돈도 받지 않으면서 내 업무 조교를 하면서 나를 도왔겠습니까?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럴 수 있었을까요?”
“결국 학생이 교수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실제적으로 그런 대사나 그런 표현이 없다는 것을 들어 그는 박 교수의 주장을 희석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주장이 맞다면, 3개월 가까이 계속 성희롱을 당했다면서 왜 매일 보러 연구실에 왔죠?”
조사위원들이 멀뚱하니 서로의 얼굴을 머쓱하게 볼 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돈도 못 받으면서 왜 계속 나를 도와주겠다고 연구실에 찾아왔다는 거죠?”
다른 대답이 생각나지 않은 것인지 회심의 일격이라고 생각하며 남자 조사위원장이 밑에 깔려 있던 종이를 하나 꺼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학생이 작성한 사직서 이메일을 보여주도록 하지요.”
남자 위원장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그녀가 작성한 이메일을 앞에 내밀었다.
6월 1일 새벽 1시 40분에 발송된 메일의 전문
사직서
안녕하세요. 저는 학생 츠리엔이에요.
죄송합니다만 6월부터 기말고사 준비해야 돼서 교수님의 작품을 중국어로 번역 그리고 수정은 저에게 너무 부담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양이 적은 번역과 양이 많은 수정은 제 한국어 실력에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작품의 번체자 번역을 맡을 의향은 없습니다 죄송하게 되지만 보다 우수한 사람을 따로 청하십시오. 그리고 저는 조언 하나가 있는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중국어로 번역 그리고 수정했던 논문, 교수님 개인적인 작품과 앱 프로그램 번역을 발표, 출판 혹은 판매하실 의향은 있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실 의향이 있으시면 번역 도와준 모두 학생들에게 먼저 저작권을 물어보시는 것이 올바르고 좋을 것 같습니다. 안 그러시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6월부터 기말고사 준비해야 돼서 학업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항상 언어교환을 끝난 뒤에 조교 업무와 상관없는 이상한 말씀을 늦게까지 하시는 게 참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이상 이유이므로 제가 사모님과의 언어교환을 그만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모님께 안부 좀 전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교 일도 사직하겠습니다. 저는 3월부터 교수님이 계속하신 교란행위(騷擾行為)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이 보기 싫다고 저보고 교수님 앞에서 삭제하라고 하셔서 억지로 삭제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전에 LINE으로 통해서 교수님의 그런 행동, 행위는 성희롱이라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함부로 저를 만지셨을 때 저는 피하면서 ‘하지 마세요’라는 말씀 몇 번이라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제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제 동의 없이 함부로 저를 만지셨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그 모두 성희롱 행위에 대해서 몹시 불편했습니다.
저를 만지시는 것, 성희롱뿐만 아니라 저는 교수님 오랫동안 저에게 하신 언어 교란(言語騷擾)에 대해서도 몹시 불편했습니다. 오랫동안 내내 교수님이 저보고 제가 교수님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처음에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그 좋아함과 고백은 뭔지 몰라서 사람과 사람의 순수한 감정인 줄 알았습니다. 전에 교수님도 저에게 ‘고백’의 의미는 남녀 사이의 고백,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5월 24일 밤에 저는 너무 피곤하고 교수님이 화내실까 봐 본의 아니게 교수님의 말씀을 따라 해 보니까 교수님이 오랫동안 말씀하시던 그 좋아함과 고백은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당황했습니다. 교수님의 유도로 ‘고백’이라는 것을 했습니다만 저는 교수님께 정말 교수님이 말씀하시던 그런 남녀 감정이 전혀 없습니다.
정확히 설명드리자면 그날 5월 24일 아침 8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밤 9시 때까지 그때 이미 기운이 없었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근데 교수님이 저를 늦게 한 새벽 2시 반까지 연구실에서 묵게 하셨습니다. 업무와 상관없이 그날 밤 9시부터 새벽 2시 반까지 내내 교수님은 계속 제가 교수님을 좋아하느냐 사랑하느냐라는 이야기만 하셨습니다. 저는 도대체 교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지 계속 저보고 제가 교수님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시고 저보고 빨리 그 감정을 인정하라고 말씀을 하신 의도가 뭔지 몰라서 너무 피곤하고 답답했습니다. 저는 계속 교수님이 혹시 어떤 감정을 말씀하고 계신지 물어봤는데 교수님이 제가 먼저 그 감정을 인정한 후에 알려준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시간도 늦어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두 너무 지치고 고달파서 교수님의 말씀을 따라 했습니다. 근데 제가 알고 있던 순수한 좋아함을 인정한 후에 교수님이 저에게 손 내밀고 잡으라고 손을 통해서 심장 맥박 느끼라고 말씀하신 그 순간부터 저는 깨닫게 되고 당황했습니다. 그 이야기 이어서 교수님 그날 밤에 하신 행동들: 교수님이 그 좋아함은 좋아함이 아니고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교수님이 남자 친구로 자칭하시면서 남자 친구랑 같이 하고 싶은 것을 교수님과 같이 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을 때, 계약을 써서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다고 레드 라인을 정하자고 말씀하셨을 때, 불쑥 저를 끌고 안고 심지어 제 손을 잡아서 교수님의 허벅지에 올라 얹으셨을 때, 제가 거부를 했지만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교수님이 따라오시고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교수님이랑 새끼손가락으로 손 잡으라고 요청의 말씀하셨을 때. 교수님의 행동들과 그 순간들을 통해서 저는 교수님이 오랫동안 말씀하시던 그 좋아함과 고백은 남녀 사이의 감정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그 어떤 남녀 감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5월 26일 LINE통화 중에서 분명히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교수님이 계속 고백한 것을 후회했냐고, 나중에 저를 힘들게 하신다고, 두고 보라고 등등 협박하는 말씀 하신 것에 대해서 저는 너무 불편하고 무서워합니다. 부디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교수님이 저에게 하시던 교란행위에 대해서 몹시 불편했습니다. 또 같은 상황이 생길까 봐 저는 조교 일을 이 자리에서 사직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학생 츠리엔 드림
그의 허를 찔렀다는 기대와는 다르게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박 교수가 대답했다.
“저는 이 이메일이 학생이, 없는 증거를 만들려고 작성하였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만약 정말로 여학생이 증거를 만들려고 했다면 당신은 그 이메일을 받고 어떠한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죠?”
“실제로 5월 중순경에 그 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왜냐하면 제가 사실은 교수님을 좋아하는데 마음대로 안 돼서 교수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변태 교수다. 성희롱 교수다.라는 증거를 모아서 고발하려고 했는데, 증거도 없고 교수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깨닫고 그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반성했습니다.’라며 사과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뭘 사과했다는 거죠?”
“결국 마음먹었던 그런 짓도 안 했는데 왜 사과를 하는 거죠?”
여권운동가 여교수가 의아하다는 듯이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물었다.
“자기가 그런 마음먹은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면서 집 사람에게 자기는 우울증 약도 오랫동안 먹은 사실이 있고, 자살시도도 했던 경험이 있고 했다고면서 말했던 학생입니다.”
박 교수가 답답한 듯이 내뱉듯 말했다.
“그래서 그것과 여학생이 교수님을 좋아했다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페미니즘 강사가 주창 자신의 주장에 맞춰 다시 한번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저도 모르죠. 어느 날은 갑자기 와서 울고, 어느 날은 와서 사과하고, 기복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격의 학생에게 저도 불같이 화를 내거나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음부터 오지 말라고 잘라버리면 교수님도 안전했을 것을 왜 그렇게 안 했습니까?”
페미니즘 강사는 결코 지치지 않고 자신이 물고 있는 궤변의 끈을 놓지 않고 물었다.
“안 보면 그만이지 왜 계속 봤냐고...”
다 들리도록 혼잣말을 구시렁거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어 남자 위원장도 자신의 논점을 하나로 결정했는지 계속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이 이 메일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 아내에게 이런 이 메일이 왔다고 상의했고, 아내는 오히려 내가 이 이메일에 뭔가 반응하거나 하게 되면 그 학생이 내가 받아주고 달래주기를 바라고 또 그런 행동을 기대하는 것이니까 아예 반응을 하지 말라고 조언해 주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 무슨 의도가 있다고 느꼈습니까?”
“이 메일에 적힌 대로 황당하게 있지도 않은 증거를 만들어서 나를 해하려고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자 남자 위원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리며 박 교수를 가르치듯 물었다.
“이게 합리적입니까? 당신을 해하려고 가짜 증거를 만들어서 이 메일을 보냈다고 합시다. 그런데 당신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이 합리적입니까? 아내의 말을 듣는 게 맞습니까?”
남자 위원장은 너무도 당연한 합리적 판단에 대해 박 교수가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여기는 듯이 계속해서 합리성을 들먹이며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섞어가며 계속 추궁했다.
“내가 반응을 하지 않고 그 황당한 조작 이메일에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이 내가 내 행동을 인정한다는 증거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박 교수가 화가 나서 따지듯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당연하죠. 당신이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저는, 아니 우리는, 당신의 행동을 인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뭐라고요?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꾸며대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학생에게 내가 뭔가 반응을 하면, 그 학생이 만든 함정에 뭔가 엮으려고 한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반응을 일절 하지 않았던 겁니다.”
“결국 당신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서 그 여자애는 성공했습니다.”
중간에 박 교수의 석을 죽이려고 하는 듯이 페미니즘 강사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내가 오늘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당신들이 나를 성희롱했다고 하면 당신들은 나에게 어떻게 반응합니까? 당신들이 어이가 없어서 반응하지 않으면 그게 사실이 된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왜 당신을 음해하려고까지 했던 그 버릇없이 구는 여학생을 자르지 않았습니까?”
다시 페미니즘 강사는 돌림노래를 불러댔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박 교수도 페미니즘 강사의 눈을 똑바로 보며 강하게 내질렀다.
“그 학생을 자르면 나는 학과에서도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이제 막 부임해서 학생을 자르면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두 명의 개인 업무 조교를 내가 먼저 잘라버린 교수로 낙인찍혀 버린다는 말입니다.”
“개인 업무 조교는 연구생(대학원생)을 써야 한다고 규정이 있었는데, 나는 대학원 수업도 없었습니다. 학과주임에게 찾아가 나는 대학원 수업이 없어 대학원생을 알지 못한다며 도움을 청했는데 학과장은 물론 다른 교수들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2학년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이 학생마저 잘라버리게 되면 가장 문제가 되는 2학년 학생들조차도 도저히 컨트롤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2학년 학생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그들은 벌써 부적임 교사라면서 연판장을 돌려서 여론을 형성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 학생들이 그렇게까지 하나요?”
새로운 공격 거리에 계속해서 공격의 빌미를 보고 있던 여권운동가 교수가 나섰다. 박 교수가 다시 한 템포 숨을 고르며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이전에 부임해왔던 한국인 교수들은 대개 그들에게 대강대강 시험을 보고 성적이 좋았습니다. 하도 시험 때문에 나에게 스트레스를 줘서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중간고사 문제로 내가 만든 문제를 내면 추후에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실제 사용하던 교과서의 워크북을 복사해서 그대로 시험을 봤습니다. 결국 그들의 성적은 절반 이상이 과락에 해당하는 50점이 안되었습니다. 그렇게 학생들의 성적이 너무 안 좋자 그들은 틈만 나면 그 성적을 어떻게 벌충할지 걱정하다가 이런 일이 생기자 이때가 기회다 싶어 나를 몰아내면 다른 교수가 시험을 대치한다는 것을 알고, 일을 이렇게 크게 벌였고 결국에는 성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중간고사 성적은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고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녀가 언어교환도 주동적으로 먼저 찾아왔고, 업무 조교도 주동적으로 먼저 하겠다고 한 게 맞습니까?”
제대로 이해를 못한 것인지 다른 주제를 찾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2학년 학생들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별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듯했다. 여권운동가 여자 교수가 다시 주제를 돌리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궤변을 내놓거나 본건과 상관없는 내용으로 자신을 조리돌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짜증이 났지만 박 교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 우리 5월 24일에 발생했다는 상황에 대한 자료를 같이 봐주시지요. 이 날은 이튿날 새벽 1시 반까지 내가 붙잡아놓고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고 그녀가 거짓 주장을 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 어떻게 그녀가 내 연구실에 오게 되었는지 증명하는 라인 대화 자료가 있습니다. 함께 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