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고 이후는 지난한 발자국을 찍어내는 나날이었다.생때같은 자식이 하루아침에 죽은 사람처럼 누워버렸으니 말이다. 아들이 당한 사고는 단언컨대 청천벽력이었다.
그날 이후, 삶은 딴 세상에서 사는 것 같았다. 마치 먹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나 사건을 만나는 것에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고가 닥쳤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천차만별일 것 같다.
우리 부부는 '현실'과 '사고'를 양발 걸치기하듯 적절하게 배분하여 받아들였다. 우리는 슬픔을 안은 채로 묵묵히 일상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사고를 당한 아들을 품고 사는 삶은 마치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묶고 걷는 것처럼 더뎠고 힘겨웠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며 지내려고 애썼다. 틈나는 대로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했더니 답답한 가슴이 조금씩 나아졌다. 시나브로 힐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마치 컴퍼스의 중심 다리처럼 우리 삶의 고정 핀이 되었다. 어디를 가도 아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무엇을 해도 마음과 몸은 어김없이 아들에게로 복귀하여 안착했다. 아무튼 아들이 우리 삶의 주축이었다.
그동안 아들의 등짝은 단 한 번도 침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들 곁을 떠나 있을 때도 있건만 아들은 24시간 내내 환자 상태인 자신의 몸뚱이를 떠나지 못한다. 단 한순간도...
아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까? 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있을까? 아들은 잠을 잘 때 '꿈'은 꿀까? 만약 그렇다면 꿈속에서 누구를 만날까? 꿈길에서는 우리를 만나고 있을까? 꿈속에서는 사고 이전의 모습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냥 기가 막힌다. 우리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조차 죄책감이 든다. 그래서아들에게 때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병원으로 오가는 삶을 허겁지겁 보냈다.
처음 2년 동안, 15군데 정도의 병원을 옮겨 다녔다. 사정상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삶의 아우성이었다. 그래도 아들은 급한 상황 없이 잘 버텼다. 그즈음에는 자다가도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는 듯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입원한 지 7년이 되던 해부터 의료보험 급여 혜택이 사라졌다. 매달 300만 원이 넘는 간병비도 힘에 버거웠다. 결단을 해야만 했다. 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증환자인 아들을 집으로 옮겨와서 간병하기로 했다. 그것이 무모할 정도로 어마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들과 같은 중한 상태인 환자가 병원을 떠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6년간 아들을 돌봤던 간병인은 눈물을 훔쳤다. 아들이 집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날부터 간병인은 식욕을 잃었다. 살이 10kg이나 빠졌다. 밤낮 주야로 씻기고, 먹이던 우리 아들과 헤어지게 되니 간병인이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간병인과 우리 아들은 생이별을 한 셈이다. 돌아오는 앰뷸런스 속에서 아들의 눈빛을 보았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들은 하품만 해대며 무념무상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반면에 집으로 향하는 구급차 뒤 쪽에서 주저앉는 간병인이 보였다. 아들이 바라보는 11월의 마른하늘은 스산하고쓸쓸했다.
급기야 우리 집은 병실로 탈바꿈했다.
모든 수납장은 아들의 간병 용품으로 가득 찼다. 아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느 한 군데도 정상인 데가 없다. 그러다 보니 구비해 두어야 하는 용품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예를 들어 목관 튜브를 드레싱 하더라도, 7.5cm 멸균거즈 (5*5/7.5*7.5/10*10 사이즈를 구비해 둠), 멸균 핀셋 세트, 드레싱용 요오드 용액, 멸균 면봉, 과산화 수소수, 메디록스 소독액, 식염수, UV 살균소독기 등이 필요하다.
식염수는 반드시 약국에서 구입해야 했다. 1 리터들이 식염수 한 박스(10병 들이)를 우리 부부는 나누어 짊어졌다. 지난해, 아들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식염수를 100개 정도나 사용했다. 우리는 <극한 직업>에 나오는 '잔도길 짐꾼'처럼 헉헉거리며식염수를 사다 나르곤 했다.
새로운 간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집으로 온 지 보름 만에 활동지원사가 배치되었다. 그때 만난 분이 바로 'A쌤'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첫 만남이 있기도 전부터 미리 A쌤의 카톡프사를 살펴보며 얼굴을 익혔다. 훈훈한 인상이었다.
"우리 센터에서 제일 훌륭한 활동지원사 선생님이에요."
동행한 센터 직원이 A쌤에 대해 소개했다. 으레 하는 말로 들렸다.
[기묘한 win-win]-출처: 픽사베이
A쌤은 챙겨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누는 삶이 몸에 배어 있었다.
우리 집에 필요하겠다 싶은 것이 있으면 들고 오곤 했다.
어느 날 밀대 걸레를 들고 왔다.
"1+1로 구입한 것이라 우리 집에 밀대가 두 개 있어서요."라고 말했다.
또한 우리 베란다에 러닝 머신을 가져다 두면서,
"여기 두고 함께 사용해요."라고 하기도 했다.
"선생님, 그러다가 선생님의 사부님까지 모시고 오시는 거 아니에요? "
밀대를 들고 오는 A쌤을 향하여 나의 남편이 농담을 건넸다.
아들이 투병한 지 11년 째다.
아들은 병원에서 6년을 보냈고 집에서 5년을 보내고 있다. 집으로 돌아온 후 처음에는 보름간 남편이 온종일 아들을 돌보았다. 그 이후로 아들은 국가로부터 바우처 포인트를 제공받았다.
초기에 받은 기본 바우처에서 몇 가지 더 신청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그래서 조금씩 포인트가 늘어났다. 아들이 '24시간 활동보조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었을 때부터는 야간근무를 할 활동 지원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설령 허리가 좋아지더라도 해오던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하여 활동지원사 자격증을 취득해 둔 상태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야간 근무 활동지원사로 수고해 주실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주저하기는 했지만 우리의 간곡한 부탁을 수락했다.
그래서 A쌤의 남편인 B쌤도 아들의 활동지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에 A쌤 부부는 우리 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큰 교회를 섬기던 분이고 그 교회의 성가대에서 주역을 담당하셨던 부부였다. 그런데 그날부터 우리 교회에 와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했다. 우리 교회는 성도들이 출석하기를 꺼리는 작은 교회인데...
그렇게 하여 그분들은 우리 교회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집이 그분들의 직장이 된 셈이다.
그때부터 서로 불편하지 않으려고 우리 부부가 집을 얻어서 나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결국 세컨 하우스 살이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