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게장을 딱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언젠가 맛집에서 간장게장 정식을 맛있게 먹었던 적이 있다. 또한 무인 판매점에서 간장게장을 산 적도 있다. 한 마리에 만원 정도였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허망했다. 간장게장은 비싸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붓기만 하면 완성된다는 만능게장 간장이 출시되었다고 하니 간장게장을 직접 담그고 싶었다.
일단 만능게장 간장을 먼저 주문했다. 혹시 시장에 마땅한 꽃게가 없으면 그 간장을 새우, 연어, 삶은 계란 등에 부어 밑반찬을 만들 심산이었다.
재래시장의 어물전을 여러 군데 다녔다. 가장 크고 알이 꽉 찬 암꽃게를 골랐다.
'그냥 조금만 사서 간장게장을 담가본 후에 맛있으면 본격적으로 담글까?'
'붓기만 하면 된다는데 담그는 김에 2kg 정도는 담가야 딸내미네와 나눠 먹지.'
뭐든지 많이 하는 성격이라 간장게장을 조금만 담자니 성에 차지 않았다. 어물전 다라이 속에서 집게를 올렸다 내렸다 하느라 분주한 꽃게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이제 꽃게 안 나와. 끝물이야. 지금 사야 돼."
라며 직원이 결정을 못하고 있는 나를 부추겼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김에 2kg을 사자.'
뭣에 홀리기나 한 듯이 꽃게를 잔뜩 사기로 맘먹었다. 직접 다라이에서 꽃게를 골라 담을 수 있었다. 물에서 심하게 반항하고 버둥대는 녀석들만 골랐다. 살아있는 꽃게를 사 왔으니 신선도는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 온 꽃게를 싱크대에 쏟아부었다. 꽃게의 배 쪽을 위로 해 두니 녀석들이 기어 다니지는 않았다.
면장갑을 끼고 솔로 깨끗하게 씻었다. 게를 씻을 때 집게를 사용하니 편했다. 면장갑을 끼고 게를 만지는 것도 요령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맛있는 간장게장이 될 것 같았다. 레시피에 따라 간장게장 담그기가 착착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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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에서, 간장에 담가 둔 후 '3일 정도 숙성'시키면 된다고 했다. 그런 후에 꽃게를 간장에서 건져 냉동실에 보관해 두고 먹을 때마다 하나씩 꺼내랬다. 일주일 이상 꽃게를 간장에 두면 꽃게가 흐물거려 맛이 없단다.
이틀이 지났다. 왠지 맘이 불안했다. 김치를 담근 후에 하룻밤만 상온에 두어도 익지 않던가? 비록 짜디 짠 간장에 꽃게를 담갔더라도 상할 것 같았다. 간장게장을 담은 찬통 뚜껑을 열어 봤다.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종지에 국물을 덜어 맛을 봤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 맛이 아니었다. 레시피대로 하루 더 숙성시키면 삭힌 홍어처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꽃게를 간장에서 꺼냈다. 그리고 냉동실에 넣었다. 꽃게를 건져낸 간장도 조금만 남겨두고 모두 냉동시켰다. 한 여름, 입맛 없을 때 한 마리씩 꺼내어 먹을 심산이었다. 간장게장이냉동실 공간을 있는 대로 다 차지했다. 그래도 김장을 끝낸 것처럼뿌듯했다.
며칠 후에 간장게장 맛을 확인할 겸 꽃게 한 마리를 꺼내 냉장실에서 해동시켰다. 게 딱지를 따로 뜯어 내고 몸통은 가위로 조각냈다. 빨갛게 익은 살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그런데 맛을 보던 남편의 표정이 이상했다.
"당신, 이제 거의 전문 요리사 같은데."라고 했을 텐데... 칭찬 일색의 말이 없었다.
남편의 석연찮은 표정을 지켜보며 나도 간장게장 맛을 슬쩍 봤다. 쏘는 맛이 느껴졌다. 홍어가 삭으면 톡 쏘는 맛을 내듯이 간장게장도 숙성되는 과정이라 그런가?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게딱지에 밥을 비벼 먹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는데 배가 살살 아팠다. 간장게장 때문일 것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레시피를 훑어봤다.
내가 레시피에서 간과한 것이 있었다. 간장게장을 담근 후에 '냉장고에 넣어두고 3일 뒤에 꺼낸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 큰 불찰이었다. 이 더위에 냉장고에 넣지 않고 상온에서 숙성시켰으니...
꽃게 2kg 값에다 만능게장 간장 값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걱정되는 일은 바로 남편이었다. 음식 버리는 것이라면 두드러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 남편의 얼굴이 눈앞에 왔다 갔다 했다.
"이 사람아, 먹는 음식은 버리는 것이 아녀."라는 말을 남편은 자주 해 왔다.
내가 간장게장을 버리겠다고 하면 남편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됐다.
평소에도 식사하다가,
"이거, 오늘까지만 먹고, 남으면 버릴 건데."
라고 하면, 남편은 다른 반찬을 먹지 않고 내가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그 반찬으로만 식사를 끝내곤 했다.
"당신은 배고픈 것이 뭔지 몰라서 그래. 음식은 버리면 안 돼."
남편은 나와 동시대에 살았건만 자랐던 지역이 달라서 그랬는지 배고팠던 시절 얘기를 곧잘 했다.
근데 친정아버지는 남편과 달랐다. 때로는 음식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어. 아깝다고 먹으면 더 손해 보는 법이야."
밤새 고민했다. 남편 몰래 해치운 후에 이실직고할까? 그런데 그게 나중에 더 일이 복잡해질 것도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여보, 아무래도 간장게장이 상한 것 같아. 내가 레시피를 정확하게 숙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렇지? 나도 맛이 좀 이상했어."
남편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사실, 꽃게를 내버리겠다고 하면 예상되는 남편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자세히 좀 읽어 보지.
당신은 덜렁대는 게 문제야.
엎질러진 물이네.
아니면, 위로한답시고 했을 법한 말도 그 레퍼토리가 짐작이 됐다.
당신 고생한 게 아깝네.
큰 사고 난 것에 비하고 까짓 거 훌훌 털어버려.
아깝지만 죽은 자식 거시기 만지는 꼴이지.
없었던 일로 해.
남편이 무슨 말을 했을지라도 나는 유구무언이어야 했다. 또한 남편이 어떤 말을 했더라도 나는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간장게장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냉동실에서 꽃게와 간장을 모두 꺼냈다. 찬통의 바닥 부분을 수돗물로 적셔 냉동된 꽃게가 통에서 잘 떨어지도록 했다. 꽃게만 내다 버리면 냉동된 간장은 녹여서 싱크대에 쏟아부으면 그만이다.
꽃게 담은 찬통 두 개를 커다란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나가니,
"내가 같이 가 줄까?"라고 남편이 한 마디 했다. 영 맘이 불편했다.
"아니, 그냥 붓기만 하면 되는데, 뭘."
라고 츤데레 별일 아닌 척했다. 남편의 의도가 궁금했다. 내가 창피할까 봐 음식물 쓰레기 투입구에 넣을 때 망을 봐주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꽃게가 무거울까 봐 그랬을까?
혼자서 터덜터덜 공동 출입문을 나서는데 다른 동 출입구에서 어떤 분이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나왔다. 일단 그분이 먼저 음식물 쓰레기를 투하하도록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분 바로 앞에서 그 많은 꽃게를 음식물 쓰레기 수거통에 쏟아부으면 그분이 별 생각을 다 할 것 같았다. 뒤통수가 따가웠을 것이다.
마침내 음식물 쓰레기 투입기 앞에 섰다.
투입구가 열리는 순간, 나는 사방팔방을 살펴봤다. 누군가 쳐다볼 것만 같았다. 경비실에는 마침 '순찰중'이라는 패찰이 걸려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경비실에서 내 행각을 훤히 봤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꽃게를 투입기에 투하하려는데, 꽃게가 일반 쓰레기인지 음식물 쓰레기인지 헷갈렸다. 사실은 신문지에 말아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어 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여간, 꽃게 2Kg의 장례식을 치르는 느낌이었다. 화장터는 아니지만 음식물 쓰레기 투입기 속으로 꽃게를 떠나보내는 예식을 하는 것 같았다. 완료 버튼을 누르니 122원이 지출됐다. 그러므로 꽃게 장례비는 122원이었다.
꽃게를 버리고 돌아왔는데도 남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남편이 어떤 말을 했더라도 내게 위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만약, 남편이 쓴소리를 했더라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난감한 일을 당했을 때, 위로보다는 차라리 그냥 지켜봐 주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값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위로라고 했던 말이 가슴에 콱 와서 박힐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말없이 지켜보는 것이 진정한 아군이요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남편이 어떤 실수했을 때 가급적이면 입 다물기로 했다.
* 조개, 홍합, 게 등 갑각류의 껍데기는 일반종량제 봉투에 투입하여야 하며(출처: 구글 검색): 게 껍질은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