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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콩 Oct 31. 2024

차라리, 바쁜 게 편한 사람(2)


차라리, 바쁜 게 편한 사람


저녁 9시, 오늘도 결국 노트북을 끌어안고 침대에 들어와 눕습니다. 시간상으론 분명 일과를 끝내고 쉴 시간이지만, 아직 체력이 남아 있으니 마지막까지 뭐라도 조금만 더 해볼까 하는 작은 발버둥이지요. 이렇게 잠자리에까지 노트북을 끌고 오게 된 건 대략 반년 정도 되었는데,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쉴 때 밤에 무언가를 해서 성공했다더라, 하는 어디선가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로 인해 생긴, 역시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아침 이부자리 정리하기’와 함께 시작했던 습관이랍니다.


고백하자면 노트북을 켜놓긴 하지만 정작 일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편이라 이 시간쯤이면 이미 피곤해서 의지력이 남아있지 않거든요. 글을 조금 써 보다가도 금세 집중력이 흐트러져 인터넷 창을 켜거나 SNS를 봅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이 잘 때…’ 같은 말이 괜히 머릿속에 어른거려 괜히 부적처럼 노트북을 머리맡에 두게 됩니다. 그러면 딴짓을 좀 하더라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거든요. 하여간 꾸준히 좋은 습관을 들이려 시도하긴 하는데 이상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는 저 스스로가 의지력이 있다 해야 할지 없다 해야 할지 헷갈리는 요즘입니다. (놀고 싶다는 의지 하나는 확실한 것 같네요.)


그렇게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켜둔 상태로 OTT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알고리즘에서 아주 오랜만에 <이누야샤> 라는 애니메이션을 발견했습니다. 투니버스를 보며 큰 90년대생이라면 알고 계실 반가운 이름이지 않을까 싶은데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만화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누야샤’라는 개 요괴, 아니 반요(절반은 요괴, 절반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신비한 우물을 통해 현대에서 전국시대로 건너간 여자 주인공 ‘가영’(일본 이름 카고메)과 만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전설 속의 ‘사혼의 구슬’을 사악한 적의 손에 넘어가기 전에 찾으며 여러 동료를 만나 성장해 간다는 성장 소년물 만화죠.


처음엔 어릴 때 기억에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과거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다시 보이더라고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게 반요였던 이누야샤가 위기에 처해 궁지에 몰리면 요괴의 피에 압도되어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각성하는 장면이었는데, 빨리 진정시키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누군지를 잊고 영원히 상대를 죽이는 싸움 괴물이 되어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좋은 형태는 아니긴 하지만,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되지 않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통제하면서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죠. 


만화를 보면서 만약 나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성장하고 싶은 욕심에 자신을 자주 잃어버렸거든요. 휴식 시간 없이는 몸이 무너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빈 시간을 일거리로 꽉꽉 채워 넣으며 쫓기듯 살았습니다. 이건 제가 특별히 일을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성취욕과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죽을 거라는 두려움이 견고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서 휴식의 중요성 같은 나약한 건 부서져 버렸다고 할까요. 그러다 류마티즘성 관절염이라는 자가면역질환을 만나 많이 고생하고 깨닫고서도 여전히 잠자리에 노트북을 끌고 들어오는 걸 보면, 아직도 휴식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은 떨치지 못한 모양입니다.


바쁨이란 나도 남들처럼 무언가 하고 있다는 묘한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귀찮은 일들을 미룰 수 있는 편리한 방패막이가 되어줍니다. 바쁘니까, 신경 쓸 틈이 없으니까. 처음엔 아주 사소한 것부터-샤워하고 귀찮은 바디로션 바르기, 매일 아침 족욕하고 산책하기, 책상 깨끗하게 유지하기, 신경 써서 밥 차려 먹기 같은 작지만 나를 챙기는 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그다음으로는 주변을 외면하게 됩니다. 가족과 저녁 식사에서 나누는 소소한 일상 얘기도 귀찮아지고, 보고 싶다며 연락이 오는 친구 모임에도 빠지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우선인지를 잊는 것입니다.


그러다 끝내는 나 자신을 잊게 됩니다. 내가 누구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더 이상 삶의 방향이나 행복, 꿈 같은, 실은 삶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정답이 없고 의식적인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어려운 과제들인데 비해, 우리 마음속 소리는 아주 작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있어야만 비로소 조용하게 직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물에 휩쓸려 가듯 바쁨 속에 휘말려 살다 보면, 어느새 알 수 없는 곳에 흘러들어와서야 ‘여긴 어디지?’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치며 흘러간 곳이 행복이 아니라는 걸 이젠 압니다. 시간을 내어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진짜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사이 궁지에 몰린 몸과 마음은 무너지고 내가 아닌 괴물 같은 무언가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만화 속 이누야샤가 그랬듯 우리도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바쁨이라는 보호막에서 용기 내 나와야 합니다. 


오늘은 저도 노트북 없이 자는 걸 연습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내어도 볼 겁니다. 아주 작더라도 몸과 마음이 숨쉴 수 있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거절이든, 포기든, 무엇이든 해서 시간을 내고 진짜 중요한 것을 빼앗기지 말아야겠죠. 자신을 구제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 끊임없이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위 글은 장재열의 <오프먼트> 뉴스레터에 연재중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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