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녜 Apr 15. 2022

사랑의 의미

연인의 있는 그대로를 귀애하는 마음

'실로 이어진 인연'이라는 표현이 있다. 가느다란 실이 서로의 손끝에 묶인 채 태어나지만, 존재는 각자의 인생에서 부재한다. 그러다가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두 사람은 마주하게 되고, 실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엔 아름다운 매듭을 맺는다. '실'이라는 매개체는 '운명'을 색다르게 풀이한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뱉을까 하다가도 꿀꺽 삼켜 보았을 것이다. 특히 연애할 때마다 '이 사람이다!' 하는 직감이 결과적으로는 '틀리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운명을 더는 믿지 않기로 다짐한다. 말레이시아에서 지금의 J군을 만나기 전까지 약 5년간 이성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부모님의 성화가 있었지만, 사랑에 회의감이 들어 이성 교제를 꼬깃꼬깃 접어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이제껏 세 번의 연애를 해왔다. 첫 번째는 순수했던 '지난날의 내'가 가끔씩 그리운 한국과 뉴질랜드 간의 풋사랑 연애였고, 두 번째는 상대방의 어이없는 거짓말로 짤막하게 끝나버린 한 달간의 만남이었다. 세 번째는 오랫동안 친구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지만, 세 번의 기회에도 거만했던 그의 태도에 가차 없이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 관계였다.


  고작 세 번밖에 연애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아느냐고 질책하겠지만, 세 명 중 두 명에게서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경험해서 사랑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항상 감정 쓰레기통이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튼튼한, 폭풍이 불어닥쳐도 쓰러지지 않는, 강철로 만들어진 쓰레기통 말이다. 한 번씩 나약한 모습을 내비치면 그들은 위로는커녕 실망했다며 나를 비난했다. 다행히도 '아차!'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연인에게 이별을 고했지만, 그때의 상처는 끝끝내 지워지지 않아 말레이시아에서도 보따리마냥 끌어안고 있었다.


  그러나 J군을 알고 나서부터 사랑하고 싶은 용기를 낸다. 그와 연인 사이가 되면서 그에게서 사랑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한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날것의 모습을 보이는 게 그에게는 가능하다. 곡소리를 내며 꺼이꺼이 우는 모습에 그는 자신의 품을 기꺼이 내어주고, 가끔씩 부딪히는 사소한 갈등은 늘 대화로 푼다. 민낯이 예쁘다듯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마음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그에게서 역으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 또한 그처럼 ‘사랑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솔직한 그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그와의 연애는 캠퍼스 새내기 커플처럼 늘 새롭다가도 말레이시아에서 함께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면, 우리 사이는 이제 설렘을 넘어서 편안함에 이르렀음을 깨닫는다. 요새는 새끼손가락 끝에 묶인 실의 끝이 그의 손가락을 향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문한다. 말레이시아의 일상에 첫발을 디디게 했던 대상은 취업이었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던 실재는 J군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으니 이 같은 의심은 어찌 보면 합리적이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로운 나를 발견해도 그것마저 귀여워하는 그를 통해서 사랑은 연인의 있는 그대로를 귀애하는 마음인 듯싶다. 아직은 사랑에 있어 변덕스러운 미운 4살이더라도, 어린아이 같은 나를 변함없이 아끼는 J군과의 미래를 기대하며, 짧은 글로나마 그에게 고마운 감정을 살며시 전한다.


이전 12화 경청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