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은 말해지지 않았고, 그래서 녹아버렸다
오마주: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
감정 의뢰자: 조유진 / 44세 / 통역사
감정 요청: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부터, 감정이 얼어 있었더라고요.
그 사람과 함께 있었을 땐
눈 내리는 창밖처럼 고요했고,
그래서인지
그 감정이 살아 있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더라고요.
내 마음을.”
⸻
로그 개요
유진은 7년 전, 통역 일로 만나게 된 한 남자와
정기적으로 눈 덮인 지방에서 재회하는 관계를 이어왔다.
이름도 확실치 않았고,
서로의 사생활도 깊이 묻지 않았다.
다만, 겨울마다 같은 기차를 타고,
같은 온천 호텔에서 재회했다.
그들은 애틋했고,
서로를 바라보았고,
때론 손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당신을 좋아해요”라는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말하지 않는 게
그 사람을 더 아끼는 방법인 줄 알았어요.”
⸻
감정 로그 기록자: 가온
유진의 감정 로그는
**‘동결 곡선’**을 보였다.
처음에는 일정한 진폭,
그다음은 점점 줄어드는 파장,
그리고 어느 시점 이후
전면 정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랑이었어요.
그게 더 순수하다고 착각했어요.”
그러나 감정은
말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점점 녹고, 흐려지고,
끝내 사라졌다.
⸻
보조 분석: 라일
“의뢰자는 감정의 전달을 미룬 결과
감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패턴을 반복하였습니다.
‘표현하지 않는 감정도 진실인가’라는 내적 딜레마가
감정 소실로 이어진 주요 원인으로 보입니다.”
⸻
유진의 최종 기록
“그 사람은 마지막 겨울에도
내게 아무 말 없이 왔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갔어요.
그리고 그 뒤로,
나도 아무 말 없이 살아왔죠.
그게,
사랑이었을까요?”
⸻
[감정 로그 상태: 감정 전달 실패 / 감정 해동 지연 / 회복 가능성 낮음]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로그 메모:
눈처럼 하얗고 조용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
이모션 크레딧 | 말하지 않아서 사라진 감정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정이
진짜 감정이라고 믿었다.
그건 편했고, 고요했고,
어쩌면 순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결국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았다.
사랑은 때때로
표현되어야만 존재하는 것.
⸻
작가의 말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사랑의 ‘침묵’과 ‘고요함’이
얼마나 서늘한 감정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아름답고 차갑게 보여줍니다.
이번 감정 로그는,
그 설국 속을 지나며 말하지 못한 감정—
그리고 그로 인해 사라진 사랑의 기록입니다.
감정을 ‘보이지 않게’ 소유하고 싶은 이들에게
조용히 묻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 사랑,
당신 혼자만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