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나무 Nov 05. 2024

희망하고 꿈꿀 것이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순간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었다. 양쪽 유방 모두에 암이 있다는 진단을 받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절망하고 좌절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암이라니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았다.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고 방사선 치료와 표적치료를 버텼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항암치료였다. 항암 치료 중에는 조금만 먹어도 구토가 나고 두 다리로 중심을 잡고 서는 것도 힘들었다. 그뿐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두 빠졌다. 머리카락도 눈썹도 한 톨 남김없이 모두 사라졌다. 나의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시점에 마치 사형선고 같은 암이라는 진단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내가 곧 죽을지 모른다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희망이 사라지고 남겨진 두려움을 극복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상실하는 순간 이대로 인생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감이 느껴졌다. 살아오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다. 그때마다 극복하고 버티며 여기까지 왔는데 유방암이라는 복병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고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은 유혹마저 느꼈다. 그때 알았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희망은 살아가고 버티게 하는 삶의 동력이었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Gladstone O'Neill)은 "희망은 삶 속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힘이며 죽음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라고 이야기했다. 죽음까지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희망인 셈이다.  



어느 날 악마가 폐업 선언을 하고 사용하던 영업 도구를 경매에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부분의 도구들은 새것처럼 윤이 났는데 오직 한 가지 도구만 닳아 헤어지다시피 했다. 그 연유를 물으니 악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그건 내가 가장 즐겨 사용했던 도구였소.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절망이라는 도구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지. 그것만 사용하다 보니 이렇게 낡았다오" 악마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한 가장 강력한 도구가 절망이었다.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있으면 좌절하고 낙심할 때 일어설 수 있다. 훗날을 기약하고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절망이 엄습하면 일어설 수 없게 된다. 주저앉게 된다. 장자는 "마음이 죽은 것만큼 큰 슬픔은 없다"라고 말했다. 육신은 살아 있어도 마음이 죽으면 온기 없는 불꽃과 같아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再) 하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운명을 탓하고 '나는 안 돼'라고 좌절하는 순간 진정한 불행이 시작된다.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 살아가야 할 이유가 보이지 않게 된다.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그것은 더욱 성장하고 도약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게 되면 그때는 불행의 늪에 빠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너무나 잘 알려진 우화로 끓는 우유 속에 빠진 생쥐 이야기가 있다. 끓는 우유에 빠진 어떤 생쥐는 탈출하려고 시도했지만 거듭 실패하자 낙담해 죽고 말았다. 반면 다른 생쥐는 탈출에 실패했지만 어떻게든 살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발과 꼬리를 사용해 계속 우유를 휘저었다. 그랬더니 점점 우유가 굳어져 치즈 덩어리가 만들어져 결국은 탈출할 수 있었다. 동일한 상황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는 이야기다. 희망이 때로는 살고 죽는 것을 가르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分水嶺)이 되기도 한다. 희망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들고 불행도 행복으로 바꾸어주는 마법다. 내가 다시 산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희망이 사라지면 살아갈 이유가 보이지 않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몇 살이 되었든 꿈꾸고 희망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