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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행 Jan 26. 2024

어느 살인청부업자의 고백

: 쓸데없이 재미있게 살아볼게


나는 살인청부업자입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며 오늘 하루 누가 죽어 나갈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AE? CW? PD?



영화나 드라마에서 멋지고 잘 나가는 전문직이자 낭만의 직업이 광고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실 광고 만드는 일은 제법 폼이 납니다.


만족할만한 광고 아이디어와 컨셉을 뽑고 멋진 광고 카피를 만들고 감각적인 광고영상을 제작하고, 내가 만든 광고가 TV와 인터넷에 쏟아져 나올 때면 꽤나 우쭐한 기분이 듭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비할 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의도에 맞는 섹시한 기획과 전략, 멋진 컨셉과 키메시지를 만들고, 

영상제작을 하다 보면 화려한 광고일이 이만 저만 멋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PT를 끝 마치자마자 광고주는 감동에 겨워 박수 세례와 갈채를 쏟아냅니다. 

6시, 정시 퇴근해서 석양이 지는 와인바에서 멋지게 색소폰을 부는 내 모습에 흠뻑 빠져듭니다. 


‘아! 광고회사 다니길 정말 잘했어!’


이런 생각과 꿈을 안고 

입사한 광고쟁이들은 이제 곧 차례로 죽어나가기 시작합니다. 



광고회사에 떠도는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밉고, 

끔찍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광고 회사에 취업시켜라! 



광고회사에 들어오는 순간, 


출근과 퇴근을 박탈당하고

주말과 휴일의 개념은 블랙홀 속으로 사라지고

술과 담배로 간과 폐를 녹아내리며 

아이디어를 뽑아내느라 머리카락을 다 뽑아내고

노예 부리듯 불러대는 광고주에 맞춰 밤낮없이 노예가 되어가고

쥐꼬리만큼의 연봉으로 쥐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을 중에 을


생각해 보면

꼭 광고를 만드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매 순간 자신을 소모시키며 살아가는 직업인입니다.

나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따라 휩쓸려 표류하는 직장인입니다.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분명,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 내게 가르쳐 준 직업인의 세계란  

‘자아실현’이라는 아주 꿈같고 달콤한 젓과 꿀이 흐르는 그 무언가였는데 말이죠.  


오늘도 나는 이런 우울한 기분으로 회사에 출근합니다. 


면접 테이블 앞에 앉아 어떤 녀석을 죽일지 고르고 또 고릅니다. 


나는 광고회사의 20년 차 대표입니다. 

살인청부업자입니다. 



P.S.

AE 광고기획자

CW 카피라이터

PD 프로듀서입니다. 오늘 죽어나갈 명단입니다. 

이전 10화 20년 전 나에게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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