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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린 Oct 22. 2021

마지막 한 모금


알바를 그만뒀다. 그만둔지는 약 삼주, 2년을 꼬박꼬박 근무해오던 곳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이 오나 상관없이 꾸준히 일을 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 앞치마를 입고 밖을 바라보는 것이 일의 시작이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카페 일이 즐거웠던 일 년 , 계절에 따라 많이 나가는 음료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름은 꿀떡꿀떡 마실수 있는 아메리카노와 시원한 스무디 종류가 잘 팔렸다. 그러다 저녁이 쌀랑해지는 가을이 오면 점점 따듯한 음료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겨울이 오면 라테가 매출의 반 정도를 차지하곤 했다. 나는 뼛속까지 아이스. 고양이 혀를 가지고 있는 탓에 따듯한 음료에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스만 먹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스 음료를 먹는 사람이라 계절에 따른 음료란 내 삶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들어오는 주문을 보며 계절을 가늠하게 되었다. 주전자 가득히 우유를 붓고 스팀을 하면 몽글몽글하게 올라오는 거품이 꼭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겨울이야. 겨울이 왔어


그러면 나는 홀린 듯이 따듯한 음료를 내려 마시곤 했다. 혀를 데이지 않으려면 신중함이 필요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컵을 양손으로 꽉 잡고 호호 불어 조심히 한입 마시고 나면 몸이 따듯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모금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겨울을 시작하고. 해의 마지막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달랐다. 내가 10월을 맞이 하며 퇴사 해 버렸기 때문이다. 9월, 일을 그만둘 것을 결심하고 일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지 상상하며 버텼다. 실제로 퇴사 날짜를 받아 들고 나면 더 나아질 것 같았는데. 그만두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떻게든 정을 붙이고 살아가려는 마음이 정말로 사라져 버리고 나니 작은 일에도 불같이 화가 났다. 학교를 다니고 알바를 하며 곡을 낸다는 것. 여러 가지 일들 사이에 중심을 잡는 것이 너무 힘들어 퇴사를 결심한 것이었는데 그만두기로 한 후 한 달. 견딤의 뚝이 무너질 듯 아슬아슬히 유지되고 있었다. 추석이 지나고 마지막 날이 왔을 때, 오늘은 일찍 마쳐주시지 않을까. 마지막 날엔 왠지 손님이 더 많이 오실 것 같아. 했던 상상과는 달리 평온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주문을 받았고, 평소와 같이 퇴근했다. 평소와 달랐던 것은 더 이상 내가 나의 음료를 만들어 먹을 일이 없으니 마지막 음료로 무엇을 먹을지 심사숙고하여 음료를 골랐던 것뿐이었다. 마지막 음료 또한 결국엔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평소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날이었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오고 퇴근 시간이 되어 퇴근하는 것까지. 가끔 들르라며 커피 한잔 공짜로 주겠다는 사장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 정말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약 삼주 , 일을 하지 않는 다고 해서 온전히 쉴 수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삶에 갑자기 공백이 생겼을 때 , 그 쉼을 온전히 잘 쉴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인 것 같다. 나는 저번 주 까지 거의 누워서 생활했다. 처음 한 주는 첫 휴일이라서 , 그다음 주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이번 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렇게나 열심히 일했는데 뭐 어때. 하는 보상 심리 적인 마음도 있지만, 사실 한번 눕기 시작하니 몸도 마음도 일으키고 싶지가 않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지만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까.


고등학교 3학년. 입시를 준비하던 때, 나의 하루는 전쟁과 같았다. 가는데만 두 시간이 걸리는 학원에 일찍 도착하기 위해서 2교시에 조퇴를 하고 학원으로 갔다. 모두가 학교에 있어 고요한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뭔가 오묘한 마음이었다. 학교를 일찍 마치고 집에 가는 날은 너무나도 좋았는데, 학원을 가기 위해 혼자 나오는 길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에 걸쳐 학원에 가 저녁 10시까지 노래 연습을 하고 곡을 쓰고 피아노를 쳤다. 곁에 있던 친구들 덕분에 그 시간이 아주 힘겹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에 비하면 아주 전쟁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의 삶은 생각보다 느슨하고 평화롭다. 그 위에 누워 따듯한 햇살 사이 부는 찬바람을 느끼며 잠드는 것은 너무나도 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몇 주간은 그냥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고양이는 내가 일을 나가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몇 주간 고양이와 함께 낮잠을 자곤 했다. 고양이가 먼저 잠들 때도 있고, 내가 먼저 잠드는 일도 있다. 작은 생명 옆에 누워 부들한 털에 머리를 비비다 보면 크고 작은 모든 것은 덧없이 느껴진다. 크고 장대한 꿈을 그리다가도 이 작은 방 한편과 고양이. 맛있는 음식 만으로 너무나 행복한 내가 느껴질 때. 나는 멈추고 싶어 진다. 때로는 요즘처럼 정말 멈추기도 한다. 창문 사이로 스미는 차가운 바람이 시려 견딜 수 없게 되면 창문을 닫고 책상 위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의 일을 시작해야지. 그 책상에는 따듯한 라테 한 잔이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만들지 않은 그 온기를 느끼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모조리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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