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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Mar 10.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9

9.


그 와중에 책 안에서는 비밀회의가 또 열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나무늘보에게 수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든 동물이 모이곤 했다. 그러나 투표 이후부터는 찬성한 동물끼리만 모여서 수수의 탈출 계획을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오늘은 일곱 마리의 동물들이 비밀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다. (‘비밀회의’라는 단어는 원숭이가 처음 쓴 것인데, 누구한테 비밀인지 아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어쨌든 멋있게 들렸으므로 그 이후로 비밀회의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올빼미가 출석을 불렀다.


“자, 나 있고. 나무늘보 있고. 원숭이 있고.”


원숭이는 “넵!”라고 외치며 손을 번쩍 들었지만 올빼미는 출석부 - 그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나뭇잎 - 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원숭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


“있고, 있고, 있고……. 오랑우탄은 벌써 자는 거야? 자기만 낮에 자는 것도 아닌데. 나도 원래는 이 시간에 자고 있어야 되는데 이러고 있는 거라고. 흠. 어쨌든 비밀회의를 시작하자. 아, 오늘은 여기서 모였지만 다음에는 우리 모두 원숭이 페이지에서 모이는 거야. 순서대로 하는 거 잊지 않고 있지?”


원숭이가 다시 번쩍 손을 들면서, “맞아, 다음엔 나야! 여러분, 다음엔 제 페이지로 오세요오!”라고 외쳤다.

올빼미는 못마땅한 말투로 “그래, 다 알았으니깐 손은 내려.”라고 말했다.


원숭이는 또 삐져서 구시렁대며 손을 내렸다.


“자, 그럼 이제 원숭이가 어젯밤에 수수에게 기술을 잘 가르쳐줬는지 우리에게 얘기해줄 차례야.”


동물들은 누워있는 오랑우탄을 기준으로 큰 원 대형을 잡아 앉았다. 원숭이는 그 가운데에 섰다.


“일단, 페이지 센 사람 도대체 누구야? 어젯밤에 수수가 코끼리를 만날 뻔했다고. 나 말고 코끼리를! 다행히 한 페이지를 넘겨서 나에게 잘 찾아왔긴 했는데, 안 그랬으면 큰일이 날 뻔했잖아. 이번에는 진짜로 잘 세야 돼.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겠어? 아무튼, 나는 소리 지르는 기술을 가르쳐줬어. 배 안에서 호흡을 후웁 끌어내서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서 수수는 이제 완벽하게 소리를 지를 수 있어. 괴물 앞에서도 소리를 잘 지를 수 있을 거야. 분명해 이거는. 어떻게 보면, 내가 내 목소리의 일부를 수수에게 심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지.”


이 말을 하고 원숭이는 곁눈질로 나머지 동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누군가 눈치채주기를 내심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차린 기색을 보이지 않자 원숭이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이건 코끼리가 말해준 건데, 사실 어젯밤에 수수가 들어오기 전에 약간의 소동이 있었나봐. 괴물이 수수의 방에 들어왔대.”


동물들이 기겁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수수가 이번에는 아예 넘어졌다지 뭐야. 그래도 책으로 들어와서는 많이 괜찮아졌어. 맞다, 수수는 책에 들어와서도 조용히 울더라.”


원숭이의 말에 유독 귀를 기울이던 두더지쥐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기술 배우는 걸 수수가 재밌어했어? 힘들어하진 않았고?”

“응! 소리 지르는 거 엄청 재밌어 해서 한참 연습했어! 우리가 몰랐는데, 수수는 웃음이 정말 많아. 내가 그렇게 재밌나? 너희는 별로 안 웃어주던데.”

“뭘 할 때 제일 많이 웃었어? 농담이라도 한 거야? 무슨 농담?”

“농담? 농담은 별로 안 했고, 아, 내가 소리 질러서 오랑우탄 깨운 얘기했을 때 엄청 웃었어! 내가 이야기를 좀 재밌게 하나봐, 그치? 아니, 페이지를 잘 셌어야지. 잘 셌으면 그런 소동도 없었을 테고, 수수도 빨리 들어와서 더 재미있게 놀았을 거라고. 이번엔 우리 정말 정확하게 세야 돼!”

“수수는 어떻게 웃는데? 울을 때랑 똑같이 소리 안 내-”


올빼미가 두더지쥐의 말을 끊으며 가운데로 들어왔다.


“자, 이제 다음 차례 할 시간이니깐 나가. 두더지쥐랑 원숭이, 너희 둘은 저기 구석 가서 계속 대화하든가. 너흰 도통 끝나지가 않잖아.”


그 둘은 올빼미의 빈정거리는 어조를 알아채지 못한 채 제안을 받아들여 가장 가까운 나무줄기로 가서 대화를 이어갔다.


올빼미는 그들을 보면서 쯧쯧 거린 다음, “자, 다음 차례! 나와서 수수한테 기술을 어떻게 가르쳐줄지 알려줘.”라고 말한 후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농구공 같이 생긴 것이 원 대형 안으로 굴러갔다. 그것은 원의 정 가운데에 도착하였고 그대로 제자리에 멈춰 가만히 있었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나머지 동물들도 말을 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원숭이가 하도 시끄럽게 하고 간 뒤라서 그런지, 그 정적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지켜보던 오실롯이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 나와도 돼.”


잠시 후, 농구공의 껍데기가 점점 펼쳐지기 시작했다. 중세시대 병정의 나무 갑옷을 연상시키는 그 껍데기는 아코디언 바람통처럼 중앙에 세 개의 주름이 지면서 앞뒤로 뻗쳤다. 그러면서 공 안에서 짤막한 다리 네 개가 아래로 삐져나왔다. 공이 완전히 펴지자 뒤에는 꼬리, 앞에는 조그만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마딜로였다.


올빼미는 원숭이에게 말할 때와는 매우 다른,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마딜로야, 그래서 오늘밤 수수한테 어떻게 가르칠 생각이야?”


아르마딜로는 잔디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들 알다시피, 구르는 법을 알려줄 건데…….”


아르마딜로는 말을 끝내지 않고 갑자기 머리를 등 안에 집어넣어 농구공 모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두더지쥐와의 긴 만담을 끝내고 돌아온 원숭이가 의아해하며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있는 오실롯에게 속삭였다.


“뭐야, 쟤 아르마딜로지?”

“쉿!”


오실롯은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입으로 갖다 댔다. 또 한 번 침묵이 흘렀다. 원숭이조차도 몸을 가볍게 으쓱거리면서 손가락을 잔디에 두드리는 것 빼고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몇 분이 지난 후, 아르마딜로는 다시 등을 펴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고개를 살짝 좌우로 돌려가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고 나서는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일단 나처럼 몸을 아주 작게 꾸기고, 그 다음에 구르는 거야. 그런데 이걸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면-”

“으악!”


원숭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르마딜로는 곧바로 몸을 웅크려 다시 농구공이 되었다.


“아, 내가 좀 조용히 있으랬지!”

오실롯이 원숭이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너, 설마 수수랑 있을 때도 이렇게 말 많이 한 거 아니지?”

두더지쥐는 못 믿겠다는 말투로 물어봤다.


“애휴, 참,”

올빼미가 중얼거리면서 아르마딜로에게 다가갔다.


그때, 나무늘보도 한마디 거들고 싶었는지 입을 열어 “원숭아,”라고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마자 올빼미는 호다닥 뒤돌아 나무늘보에게 뛰어간 다음, 날개를 펄럭이면서 “안돼, 안돼! 이 회의는 중요한 거라 빨리 끝나면 안 된단 말이야!”라고 비명을 질렀다.


(사실 이전까지는 항상 나무늘보가 회의를 진행했었다. 수수의 이야기를 알려주기 위해 동물들을 모두 모이게 한 것도 나무늘보였고, 투표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나무늘보였으며, 수수를 만날 동물의 차례를 정한 것도 나무늘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동물들이 집중하려고 노력해도 나무늘보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하나둘씩 잠에 들었다. 심지어 올빼미마저도 평소에는 똘망똘망했던 눈동자가 금세 초점을 잃었다. 이 문제를 고치기 위해 나무늘보는 평소 속도에 비해 빨리 말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더 강렬한 자장가가 되어버리는 역효과가 났다. 이러한 이유로 이번 회의부터 나무늘보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다가, 회의가 끝날 때 마지막 발언자 역할을 하기로 모두가 합의했다.)


흩날리는 깃털에 뒤덮인 나무늘보는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소란에 깬 오랑우탄이 일어나 앉아 눈 앞머리에 가득 쌓인 눈곱을 떼어 내면서, “왜 그러는 거야 다들 시끄럽게…….”라고 툴툴댔다.


원숭이는 울먹거리며 탄식했다.

“아르마딜로에 대해서 내가 먼저 소개를 해줬어야 했는데, 완전히 까먹었어! 처음에는 무슨 동그란 게 보일 텐데 그게 아르마딜로라는 동물이고, 아르마딜로가 낯을 많이 가리니깐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안 말해줬어! 하나도! 내가 다 망쳐버린 거야! 우린 망했어!”


가만히 듣던 오랑우탄은 “아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아르마딜로가 알아서 잘하겠지 뭐.”라고 대강 얼버무리고 다시 엎드려 누웠다.


올빼미는 이제 날개로 오랑우탄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얘는 여태까지 나무늘보 때문에 잠 든 게 아니네. 원래 이런 거였어. 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좀!”

“눈 뜨고 있잖아. 그냥 누워만 있는 거니깐 그만 때려.”

“그래도 좀 일어나. 넌 평생 잠만 잘 거야?”

“어, 그거 정말 좋은 아이디언데?”

“이게 진짜-”


이렇게 올빼미와 오랑우탄이 언쟁을 벌이는 동안 오실롯은 그새 원숭이에게 다가가 위로해주고 있었고, 두더지쥐는 누가 대답하건 말건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하지?”, “무슨 방법이 있긴 있겠지?” 등의 질문을 연속으로 퍼붓고 있었다. 나무늘보는 가만히 앉아 턱을 괸 채 그 모든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공에서 아르마딜로의 머리가 빼꼼 나왔다. 동물들은 단번에 입을 닫고 아르마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침묵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숭아, 걱정하지 마. 내가 수수한테 잘 가르쳐줘볼게.”


이 말을 들은 동물들은 모두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나무늘보는 바삐 손을 움직였지만 딱 한 번 손뼉을 칠 수 있었다.) 아르마딜로는 고개를 앞으로 더 뻗으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다 끝났으면 이제 내가 말해도 될까?”

나무늘보가 물었다.


오랑우탄은 촉촉한 눈망울로 올빼미를 쳐다보며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제발 그러면 안 될까, 올뺌아? 이젠 슬슬 끝날 때도 됐잖아, 그치?”라고 애원했다.


올빼미는 징그럽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그래, 그러지 뭐. 우리가 회의를 해봤자 얼마나 제대로 하겠니.”라고 대답했다.


오랑우탄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으며 바로 발라당 누워서 가장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들썩였다.


나무늘보는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알다시피, 우리가 모두 한 가지씩 수수에게 기술을 알려주면서 탈출을 위한 준비를 도와줄 거야. 그런데 아직 수수가 언제 탈출할지와 어떻게 탈출할지가 확실하지 않은 게 문제야.”


나무늘보는 자신이 구상한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오랑우탄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마리의 동물은 눈을 부릅뜨고 나무늘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그들도 손을 들어 질문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냈다. (물론, 두더지쥐가 가장 많은 질문을 했다. 몇 번은 오실롯이 두더지쥐의 손을 억지로 내리기도 했다.) 올빼미는 원숭이가 나무를 올라타 구해온 큰 나뭇잎에 손톱으로 그림을 그려가면서 모두의 말을 기록했다.


나무늘보가 계획의 마지막 부분을 말하고 있을 즈음, 두더지쥐가 또 질문이 생겼는지 손을 들려다가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져서 잠에 들었다. 두더지쥐 옆의 다른 동물들은 이미 눈이 잠겨있었다. 풀을 뜯어 입으로 씹어가면서 잠을 참아가던 올빼미마저도 스멀스멀 밀려오는 잠의 기운에 자신을 맡겨버렸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무늘보가 알아차린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곧바로 말하는 것을 멈추고 눕는 나무늘보에게서 시무룩한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때마침 오랑우탄이 잠결에 “정말 훌륭했어.”라고 웅얼거리자, 나무늘보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무늘보가 밀린 낮잠을 보충하는 내내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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