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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Feb 07.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7

7.


원숭이는 ‘기술’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그것이 마치 대단한 비밀인양 또박또박 조심스럽게 발음했다.


기술이라는 거는 말이야, 그게……. 뭐라고 했었더라? 아아, 맞다. 아주 잘하는 거를 말하는 거야. 그러니깐 내가 아주 잘하는 한 가지를 너한테 가르쳐준다는 거지. 멋지지?”

“가르쳐준다고? 우와!”


수수는 자신이 유별나게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교에서는 항상 좋은 성적을 받아왔지만, 그런 거에서 큰 의미를 찾기에는 자신이 너무 어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수수는 왠지 모를 특별한 기운을 자신에게서 종종 느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든 간에 그 기운에 힘입어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동물들이 이제부터 뭔가를 가르쳐준다니! 드디어 자신의 운명이 제대로 펼쳐진다는 생각에 수수는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왜냐하면 네가, 음, 그게 있잖아 말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이 있어. 그게 뭐였더라? ‘ㅌ’으로 시작했는데…….”


원숭이는 꺼내고 싶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을 느리게 해야 하는 것이 매우 답답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ㅌ’이면……. 타조? 아니, 내가 할 일이라고 했지? 그러면……. 아! 탈출? 내가 탈출하게 너희가 도와줄 거라고 나무늘보가 그랬어!”


그 말에 원숭이는 고개를 번쩍 들고 수수를 쳐다보며 두 눈을 빠른 속도로 깜빡였다.


“맞아, 맞아! 그래, 그래, 그래. 탈출이지. 탈출, 탈출!”


원숭이는 박수를 치려는 몸짓을 취했지만, 도중에 마음을 바꿨는지 갑자기 자세를 바로잡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나를 비롯한 멋진 동물들이 너한테 기술을 알려줄 거야. 하나하나씩. 그래서 내 기술은 말이야,”


원숭이는 살짝 뜸을 들인 다음,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소리를 지르는 거야. 아주 크게.”

“소리를?”

“응, 소리를! 그게 내 기술이야. 엄청 시끄럽게! 네가 제일 크게 소리를 질러본 적이 언제야?”


수수는 잠시 생각했다.


“음……. 난 한 번도 소리를 크게 질러본 적이 없어. 난 시끄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 말을 들은 원숭이는 움찔했다. 수수는 그 영문을 모르고 있다가 원숭이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큰 오해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에이, 너는 좋아하지 당연히! 내가 말하는 시끄러운 것들은 사람이 막 크게 뭐라 뭐라 하거나, 뭘 던지거나,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 거……. 그런 거 말하는 거야.”


“그래?”

원숭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렇다니깐!”


수수는 웃었다. 원숭이가 자신으로부터 정말로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고, 그 사실이 왠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다.


원숭이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에 수수는 “일단은 그래도 내가 한 번 해볼게,”라고 말한 뒤, 목을 위로 내밀어 최선을 다해 소리를 질러 보았다.


“아아!”


다행히 원숭이는 바로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는데 몰입했다.


“아냐, 아냐. 더 크게 해야 돼! 크게! 모든 사람과 동물이 널 들을 수 있어야 되거든. 물론 지금 이 페이지에는 너랑 나뿐이지만. 음……. 아, 저기 옆 페이지에 있는 코끼리까지 들릴 수 있을 만큼 크게 하면 되겠다! 아니, 근데 코끼리는 지금 자느라 진짜로 널 듣지는 못할 거야. 걘 오랑우탄보다 더 심해서 한 번 자면 아무리 때려도 안 일어나. 그렇다고 내가 진짜로 때려본 건 아니야. 크흠. 아무튼, 다시 해봐!”


수수는 짧게 심호흡을 했다가 다시 한 번 “아아!”하고 외쳤다.

“오! 더 해봐, 한 번 더!”

“아아!”

“점점 커지고 있어!”

“아아아!”

“다시, 다시!”


신이 난 원숭이는 양옆으로 뛰어다니다가, 그것만으로는 자신의 흥분을 표현하지 못하겠는지 아예 나무 사이를 날라 다니기 시작했다. 긴팔을 휘적거리며 이리저리 나무를 타는 원숭이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수수는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와중에 고개를 휙휙 돌려야 했다.


목이 아파진 수수는 잠시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하도 높은 가지에 올라가있어서 고작 손톱만한 크기로 보이는 원숭이를 향해 두 손을 들어 올려 그만하자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원숭이는 워낙 들떠있는 나머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요란스럽게 “다시, 다시!”를 연발하고 있었다. 수수는 빠르게 포기를 하고 잔디에 등을 대고 누웠다. 계속해서 높이 올라가는 원숭이를 구경하면서, 자신이 원숭이로부터 배워야 할 기술이 나무 타기가 아니라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저건 내가 다시 태어나도 못할 거야.’


다행스럽게도 원숭이는 곧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밑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서 뭐해? 왜 조용한 거야?”

“조금 쉬려고!”


그 말을 듣고 원숭이는 드디어 뛰는 것을 멈추었다. 그러고 나선 아까 전에 수수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꼬리를 나뭇가지에 한 바퀴 감아 매달렸다. 그렇게 또다시 얼굴이 거꾸로 된 채로 수수를 향해 외쳤다.


“그래, 여태까지 잘했으니깐! 그럼 쉬는 동안 내가 하는 걸 잘 봐봐!”


갑자기 오래된 청소기가 먼지를 아주 힘겹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뭇잎들이 격하게 흔들렸다. 수수는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유심히 귀를 기울여보니 다른 게 아니라 원숭이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입은 턱에 닿을 만큼 커져있고 눈알은 위태롭게 튀어나와있을 원숭이의 모습을 수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자, 이렇게 공기를 마셨잖아. 그 다음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배에 힘을 꽉 줘서, 방금 마신 숨을 온통 다 내뱉는 거야! 아아아아아!”


원숭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다시 한 번 잎들이 흔들렸다. 이번엔 땅까지 살짝 울리는 게 느껴졌다.


“어때, 어때? 잘하지?”


원숭이는 수수가 “응, 진짜로!”라고 대답할 동안 후다닥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땅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다음에는, “너도 해볼래?”라고 물어보았다.


수수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뒤 다시 일어났다. 원숭이가 가르쳐준 대로 입을 크게 벌리고, 배에 힘을 주고, 몸 안에 있는 모든 숨을 다 뱉었다.


“아아!”


원숭이는 옆에서 폴짝거리면서 박수를 쳤다.


“아주 좋아! 훨씬 좋아졌어! 진짜야!”


수수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목이 좀 아프긴 한데, 너무 재밌어.”


이렇게 많이 소리를 질러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먹먹했던 귀가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숭이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수수는 당황해서 혹시나 자신이 또 말실수를 했나 기억을 급히 곱씹어보았다. 그러건 말건, 원숭이는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수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괴물 앞에서도 이렇게 지를 수 있겠어?”


수수의 머릿속은 단번에 백지가 되었다.


“괴물 앞에서……?”


괴물 앞에서는 시체가 되자, 그것이 수수가 자신을 위해 세운 규칙이었다. 괴물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첫 번째 삐 소리는 몸 안에 있는 모든 근육을 정지시키라는 신호였다. 네 번째 삐 소리가 들릴 때면, 수수는 생각마저 멈춘 완벽한 시체가 되어있었다. 가끔은 너무 잘하는 바람에 ‘진짜로 죽은 건가?’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기도 했다.


그런데 괴물 앞에서 소리를 지르라니.


“아니, 못 할 것 같아.”라고 수수는 말했다. 속상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갑자기 구역질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수수는 원숭이가 트림을 하려는 줄 알고 애써 못 들은 척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원숭이가 사뭇 잔잔한 말투로 “나를 봐.”라고 말했다.


수수는 원숭이를 보려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라서 “히익!”하고 놀랐다. 원숭이는 수수의 눈 바로 앞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반짝거려서 수수가 놀랐던 것인데, 심지어 그것은 약간씩 꿈틀거리기도 했다.


“이게 뭐야?”

“이건 내 소리야. 너 가져.”


원숭이는 반짝거리고 꿈틀거리는, 물방울과 지렁이를 섞어놓은 것 같은 그것이 수수의 코에 거의 닿을 만큼 팔을 뻗었다. 그렇게 말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는 희한하게도 이전과 다르게 얇고 희미했다.


“이걸 네가 가지면, 괴물 앞에서도 크게 소리 지를 수 있을 거야. 이거 진짜 소중한 건데……. 그래도 너한테 주는 거야, 알겠지?”


수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수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 이상한 물체를 집어 다시 원숭이의 입으로 넣어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물컹한 촉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거의 던지다시피 넣었다.)


“아니야. 고맙긴 한데, 이거 없이도 난 할 수 있을 거 같아.”

“정말로?”

“응. 더 연습하면 될 거야. 왜냐하면, 너는 훌륭한 선생님이니깐!”


그 말에 원숭이는 입 안에 있는 ‘소리’를 급히 삼킨 다음, 수수가 여태껏 본 것 중에 가장 큰 미소를 지었다. (엄청난 크기였다.)


그 이후로 수수는 원숭이와 함께 소리 지르는 연습을 이어갔다. “다시, 다시!”와 “한 번 더! 한 번 더!”, 그리고 “더 크게! 더 크게!”의 끝없는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둘 다 피곤해지자,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원숭이는 걸터앉아서, 수수는 그 옆에 누워서 잠에 들었다. 수수는 금세 잠에 빠져 눈치 채지 못했지만, 책 속의 맑은 하늘은 그들을 위해 점차 어두워졌다.


잘 자던 원숭이가 잠시 눈을 떴다. 수수의 얼굴 앞에 손을 들고 휘저어서 잘 자고 있나 확인하더니, 살금살금 걸어가 넓적한 나뭇잎 몇 개를 떼 왔다. 그걸로 수수를 덮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손으로 입을 막은 후 몇 번의 구역질로 다시 ‘소리’를 꺼냈다. 원숭이는 긴 손톱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절반으로 잘랐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수수의 입 속으로 살살 넣어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입으로 도로 넣었다.


제자리로 돌아가 수수의 옆에 살포시 앉는 원숭이의 눈동자에 반사된 따뜻한 달빛이 반짝거렸다. 원숭이는 행여나 수수가 깰까봐 손바닥이 닿지 않도록 박수를 몇 번 친 뒤에,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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