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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Jan 29.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6

6.


“안녕! 네가 수수구나! 나무늘보가 이제 내 차례라 그랬어. 아니, 나무늘보가 말했던 건 아니고 우리가 같이 비밀회의를 해서 정한 거지. 그래서 너를 만나려고 했는데, 우리가 잘못 떨어지는 바람에 내가 아니라 코끼리가 너를 만날 뻔했지 뭐야! 책장 하나를 잘못 센 거 같아. 누가 센 건지, 쯧. 일단 나는 아니거든. 다음 회의 때 누군지 찾아낼 거야. 네가 마지막에 아주 똑똑하게 책장 하나를 넘겨서 정말이지 다행이야. 아무튼 코끼리는 너한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없어. 걔가 크긴 하지. 그리고 힘도 무척 세지. 그렇지만 너한테 가르쳐줄 수 있는 기술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아. 그건 내가 가지고 있대!”


원숭이는 나뭇가지에 꼬리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얼굴만 수수에게 바짝 들이민 채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수수는 원숭이의 입에서 나온 그 수많은 단어들 중 단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아까 전부터 머리가 아팠는데, 원숭이의 얼굴이 거꾸로 돼 있는데다가 하도 흔들거려서 멀미까지 나려고 했기 때문이다. 숨을 고르느라 잠시 조용해졌던 원숭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넌 참 신기하게 생겼구나! 눈이 밑에 있고 입이 위에 있네.”


다행히 수수는 이 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원숭이는 수수의 무반응에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난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 내가 조금 똑똑하긴 하거든! 물론, 기술이라는 걸 내가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지. 하지만 그래도 내가 널 만날 다음 동물로 뽑혔을 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구. 넌 기술이 뭔지 알고 있어? 모르지?”


수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숭이의 얼굴은 이제 시계추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왔다 갔다 거렸다. 제발 그만 좀 움직여 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수는 지금 입을 열면 토할 것만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수수의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숭이는 드디어 나뭇가지에서 폴짝 내려와서 수수의 곁에 앉았다. (그러고 나선 신나게 박수를 치며 “아! 너도 눈이 위에 있었구나. 나도 그래!”라고 외쳤지만, 수수는 그제야 눈앞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넋 잃고 바라보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수수는 그대로 벌러덩 뒤로 누워버렸다. 그러자 등 밑에서 푸근하면서도 시원한 잔디의 감촉이 느껴졌다. 한껏 쪼그라들어있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빠져나갔다. 풀 몇 가닥이 양볼을 간질이자, 헤집어져있던 머릿속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이 정돈되었다. 편안한 바람 소리는 수수의 두 귀를 감싸 진정시켜주었다.


이렇게 수수가 평정심을 되찾을 동안, 원숭이는 무릎을 안고 앞뒤로 몸을 흔들어 재끼면서,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수수를 몇 번씩 힐끗 쳐다보았다. 그렇게 원숭이는 고민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입을 열다가 다시 닫는 걸 서너 번 반복하더니, 결국에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저기, 왜 그렇게 계속 누워만 있는 거야?”


이제 상태가 훨씬 괜찮아진 수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야 했다. 괴물의 발소리서부터 괴물의 냄새까지 - 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리자, 그때까지 가까스로 담아두고 있던 눈물이 쭉 삐져나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던 원숭이는 그런 수수의 모습을 보고 입을 쩌억 벌었다. 입이 얼마나 크게 벌어지던지, 아랫입술이 거의 원숭이의 가슴팍에 닿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숭이의 눈 또한 어마어마하게 커졌는데, 눈알이 ‘뾱’하고 빠져나가지 않도록 눈꺼풀이 안간힘을 다해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진기한 광경에 수수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자 원숭이는 입을 더욱 크게 벌렸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지만, 원숭이는 그걸 해냈다.)


“웃는 거야 아니면 우는 거야? 나 때문에 웃는 거야? 아니면 나 때문에 우는 거야? 설마. 아니지? 난 그냥 원숭이야, 원숭이. 난 힘도 별로 안 세! 정말이야. 목소리가 좀 크긴 한데. 아, 그러면 조금 조용히 말할까?”


원숭이는 속삭이는 말투로 덧붙였다.


“이러면 괜찮아?”


수수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벌려진 원숭이의 입을 보면 자꾸 웃음이 나와서 감히 시선을 그쪽에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수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면서 몸을 일으켜 세워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원숭이의 큼직한 이빨에 빛이 반사되어 번쩍거리는 것이 보여서 결국엔 다시 또 웃음이 새어나왔다.


수수는 눈을 감아서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입술을 세게 깨물고 원숭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난 수수야.”


원숭이는 끝내 입을 서서히 오므리나 싶더니, 수수의 자기소개를 듣고 다시 입을 찢어질 듯이 벌려서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위태로움이 있었지만 수수는 다행히도 이번엔 웃지 않는 데 성공했다.


원숭이는 “난 시파카 원숭이! 그냥 원숭이라고 불러.”라고 크게 인사하더니 아차 싶은 표정으로 속삭이는 말투로 바꾼 다음, “괴물 때문에 무서웠던 거지? 늦게 와서 미안해. 그래도 코끼리 만나는 거 보다는 나았을 거야.”라고 말했다.


“아니야, 이제는 괜찮아. 그런데 코끼리는 왜? 나 코끼리도 되게 좋아하는데!”


그 말을 듣고 한순간에 입이 오므려져 작아질 대로 작아진 원숭이를 보고 수수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 그런데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너 덕분에 웃음도 나오고 진짜로 좋아.”


다시 원래의 밝은 표정으로 돌아간 원숭이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수수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와 소곤거렸다.


“나도! 나도 너무 너무 좋아! 코끼리보단 내가 낫다니깐 정말! 근데 너 지난번에는 나무늘보 만났다며? 내가 나무늘보를 얼마나 말렸는데! 자기가 기어코 너를 먼저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그렇게 우겨대서 어쩔 수가 없었어. 맙소사. 여기 들어와서 처음 만나는 동물이 나무늘보라니!”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고개를 빠르게 젓는 원숭이를 보고 수수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왜? 나는 나무늘보가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착하지. 그래, 나무늘보는 착해. 나도 나무늘보랑 정말 친하다구. 하지만 여기서 처음 만나는 동물이 하필이면 나무늘보라니!”


원숭이는 허리를 쫙 피고 팔짱을 낀 다음에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무늘보를 만나면 그 어떤 동물이더라도 잠이 들어. 걔 목소리를 들으면 그냥 바로 기절이야. 난 어쩔 수 없이 나무늘보랑 이야기해야 할 때는 준비를 단단히 하고 - 그러니깐 잠을 미리 엄청 많이 자고 간다는 거야 - 가거든. 처음에는 조금 참을 만하다가 몇 분 지나면 걔가 너무 말을 느리게 해서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데, 짜증이 나려고 할 때쯤 눈을 떠. 내가 그새 잠들었던 거지! 나무늘보는 그 동안 말 두 마디 정도를 하면서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고 생각했겠지. 불면증 치료에는 좋겠지만, 평소에는 만나기 힘든 게 사실이야.”


수수는 원숭이의 말을 듣고 드디어 그날의 미스테리가 풀렸다고 생각했다.


“어, 맞아! 난 원래 잠을 잘 참는데 어제 나무늘보랑 조금 이야기하다보니깐 눈꺼풀이 바로 무거워졌어!”

“그치? 나무늘보가 그렇다니깐. 정말이지 너무 느려서 답답해 죽겠어. 그렇다고 나무늘보가 싫다는 건 아냐. 걔는 항상 친절해. 너를 도와주자고 말한 것도 나무늘보야. 아, 물론 나는 아주 적극적으로 찬성했지. 어떻게 했는지 보여줄까?”


원숭이는 수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양팔을 들고 갑자기 점프를 하면서 “찬성! 찬성! 수수를 도와줍시다! 찬성! 찬성! 찬성! 차아안서어엉! 다 손 들어 얼른! 얼른, 얼른, 얼른! 수수 찬성하는 동물은 다 손 들어! 너 뭐하냐? 빨리 손 들어!”라고 소리질렀다.


원숭이의 다리 안쪽은 갈색 털, 뒤쪽은 흰색 털로 뒤덮여있었다. 그런 다리로 워낙 높게 그리고 빠르게 점프를 하다 보니, 수수에게는 그저 갈색과 흰색이 뒤섞인 긴 젓가락 한 쌍이 눈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원숭이는 그렇게 “찬성! 나는 찬성이요!” “원숭이는 찬성입니다!” “두 손 다 들어, 빨리!”를 조금 더 외치다가 이내 점프를 멈추고 숨을 고르면서 수수 옆에 다시 앉았다.


“사실 나무늘보가 말을 하도 길게 하다보니깐 회의에 참석한 동물들이 다 잠들어 버렸거든. 걔네들을 좀 깨우려고 이랬던 거야. 나 아니었으면 아무도 나무늘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조차 못 했을 거야. 특히 오랑우탄 걔는 이제 아주 코까지 골더라구. 그래서 내가 바로 귀 옆에다 대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어야 됐어. 어떻게 했는지 보여줄-”

“아냐, 아냐! 괜찮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렇게 옆에서 소리를 계에속 질렀더니 오랑우탄이 눈을 반쯤 열면서, ‘나도…….’라고 겨우 말하더니 다시 잠드는 거 있지? 그래서 오랑우탄도 찬성이었지.”


수수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웃었다. 이번에는 애써 참으려 하지 않고, 원숭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크게 입을 벌려서 깔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런 수수를 보고 원숭이도 신이 났는지, 자신의 긴 팔을 수수의 목에 휘둘러서 수수를 안아주었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열심히 소리 지른 덕분에 너랑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뻐! 정말, 정말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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