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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Jan 17.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4

4.


“우리는 비밀회의를 열어서 투표를 했어. 사실 회의는 내가 열자고 한 거야. 난 너를 늘 지켜봤거든.”

“정말? 여태까지 계속?”

“그럼.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왜?”

“너는 매일 밤마다 무서워서 아무 소리도 못 냈잖아. 울 때도 소리 내지 않고 우는 걸 봤어.”


수수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잘 몰라 대답하지 않았고, 나무늘보는 그런 수수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수수는 나무늘보의 눈초리를 피해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무늘보 뒤에는 큰 나무가 있었다. 얼마나 컸냐면, 수수가 아무리 고개를 쭉 뻗어서 올려도 제일 위에 달린 나뭇가지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 나무 옆에도 비슷하게 큰 나무가 있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그 옆에도. 한 바퀴 돌아보니 사방이 나무였다. 촉촉한 풀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수수는 자신이 두 발로 잔디를 밟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야 깨달았다. 하늘이 참 파랬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서 무서운 것들을 상상하며 바라본 하얀 천장보다 이 책 속의 하늘이 훨씬 더 좋았다.


‘나무가 몇 그루나 있는 거지?’


수수는 자신이 나무를 세는 정확한 단위를 알고 있다는 점이 내심 뿌듯해서, ‘한 그루, 두 그루, 세 그루’라고 속으로 말하며 나무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세 그루까지 셌을 때, 나무늘보가 다시 말을 꺼냈기 때문에 수수는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래서 내가 본 걸 이 책에 있는 다른 동물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어.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 같이 투표를 했어. 너를 도와줄지, 말지를 말이야. 모두 찬성하지는 않았어. 우리는 사람을 무서워하거든.”

“사람을 무서워한다니?”

“너도 사람을 무서워하잖아. 너도 사람이면서 말이야.”


갑자기 억울해진 수수는 재빨리 소리쳤다.


“그건 괴물이지, 사람이 아니야!”


수수는 너무 크게 말한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나무늘보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지만, 나무늘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때까지 턱을 괴던 두 손을 얼굴에서 떼기 시작했다. 수수는 그 손을 보며 예전에 엄마가 읽어 주었던 『피터팬』에 나오는 후크 선장의 손이 생각났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나무늘보의 손에는 갈고리가 세 개씩이나 있었다. 그 신기한 생김새에 완전히 사로잡힌 수수는 금세 긴장을 풀었다. 그러다 문득 질문이 하나 더 떠올랐다.


“있잖아, 나를 도와준다고 했잖아.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나무늘보는 턱에서 손을 완전히 뗀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어찌나 시간이 오래 걸리던지, 그동안 수수는 자리에 풀썩 앉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계획을 다 세우진 못했어. 우선은 내가 너랑 만나보기로 했거든. 그래서 오늘 너를 넘어뜨리려 한 거야. 넘어지지 않길래 발가락을 찔렀어. 미안해.”


나무늘보는 느릿느릿 수수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수수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손에 달린 갈고리로 발가락을 살짝 건드렸는데, 너무 간지러워서 수수는 참을 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서둘러 두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새어나오는 웃음소리와 생글거리는 두 눈은 숨길 수 없었다. 한참을 걸려 고개를 다신 든 나무늘보의 얼굴에도 큰 미소가 피어있었다. 그걸 보고 수수도 손을 내려 자신의 미소를 훤히 드러냈다.


“난 괜찮아! 별로 아프지도 않았어. 그러면 있잖아, 계획이라는 게 어떤 계획이야? 나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질문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수수는 나무늘보가 이제 조금 더 빨리 대답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무늘보의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시간대로라면 밤이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수수의 말투에도 조금씩 졸음이 묻어 느려지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수수야. 넌 앞으로 우리를 차례대로 한 마리씩 만나게 될 거야. 네가 괴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우리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

“내가 탈출을 할 거라고?”

“응. 탈출할 수 있게 우리가 도와줄게.”

“너희는 왜 나를 잘 모르는데도 도와주는 거야? 내가 착한지 나쁜지 어떻게 알아?”

“너는 매일 밤 울잖아. 착한 동물이 나쁜 동물보다 더 많이 우니깐, 사람도 같을 거라고 생각했어.”


잠결의 무게에 맥을 못 추고 있던 수수의 눈꺼풀이 살짝 흔들렸다.


“그런데 나무늘보야, 탈출하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거야?”


이 질문을 간신히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수수의 눈꺼풀은 결국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 때문에 수수는 나무늘보가 막 대답하려고 입술을 차분히 우물거리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잠을 참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괜히 자랑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수수는 괴물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잠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두가 벗겨지며 나는 두 번의 쿵 소리에 자세를 장전했고, 현관문이 닫히며 내는 소음이 적막을 깨는 그 찰나에 살금살금 걸어가 문틈에 귀를 갖다 댔다. 괴물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면, 수수는 그제야 침대로 돌아가 무서운 것들을 한 번씩 더 상상한 뒤에 잠이 들곤 했다. 때로는 오늘처럼 괴물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나무늘보는 천천히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역시나 한참이 걸렸기 때문에 그동안 수수는 잠꼬대하듯이 “이상하네….”, “너무 졸려….”라며 계속 중얼거렸다. 드디어 수수에게 등을 돌린 나무늘보는 “업혀도 돼.”라고 말했다. 수수는 겨우 실눈을 떠서 손으로 잔디를 짚어가며 나무늘보의 등에 순순히 올라탔다.


“이상하다……. 이상해…….”


손에 잡히는 부드러운 털, 콧속으로 들어오는 푸른 냄새, 어딘가 위로 계속 올라가는 느낌. 모든 것이 너무나 이상한 와중에, 수수는 여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아주 깊고 나른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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