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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Jan 23.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5

5.


다음날 밤, 수수는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턱 밑까지 덮은 이불 속에서 어젯밤을 생각했다.


‘아냐, 나는 분명히 나무늘보랑 이야기를 했어. 나무늘보는 나를 등에 업고 나무를 올라탔어. 엄청 높게 올라가는데도 무섭지 않았어. 그 부드러운 털도 기억나고 그 냄새도 기억나. 나는 진짜로 나무늘보의 등에 업혀서 잠을 잤고, 눈을 뜨니깐 아침이었고 침대 위로 돌아와 있었어.’


그래도 수수는 혹시 몰라 꿈에 나올만한 무서운 것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귀신. 쥐. 벌레. 지네……. 그런데 나는 진짜로 나무늘보의 등에 업혀서 잠을 잤어. 나무늘보는 내가 탈출할 수 있다고도 말했어. 탈출한다는 건,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말일까?’


수수는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베개 옆에 놓여있던 책을 눈앞에 들었다. 나무늘보는 항상 그랬듯이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약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어제 나 업어준 거 맞지?”


그날 아침에도 수수는 나무늘보를 향해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번에도, 나무늘보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삐---삐---삐---삐.


책을 잡은 수수의 두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평소보다 한참 느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괴물이 화가 났다는 신호였다. 수수는 책 속의 나무늘보에게 속삭였다.


“도와줘! 괴물이 왔어!”


쿵.

쿵.


수수는 책을 앞뒤로 흔들면서 다시 나무늘보의 귀에다 입을 대고 조금 더 크게 “도와줘!”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수는 여전히 침대 위에 있었다.


현관문이 닫혔다.


수수는 더욱 격렬하게 책을 흔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무늘보의 시선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와줘, 나무늘보야. 제발 도와줘. 나무가 가득한 그 곳으로 다시 데려가줘.”


괴물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졌다.


“나무늘보야, 제발…….”


발소리가 수수의 방문 앞에서 멈추었다. 누런 체취가 문틈 사이로 스멀스멀 흘러 들어오다, 방문이 열리며 일으킨 작은 바람과 함께 확 퍼져 방안을 가득 채웠다. 


수수의 몸이 저절로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책을 들고 있던 양손에는 힘이 스르르 풀렸고, 책은 침대 모서리에 한 번 부딪혔다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책장들이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퍼드득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수수는 결심했다.


‘이젠 절대로 그런 꿈을 꾸지 않을 거야. 내일부터는 꿈에 나오지 않게 꼭 나무늘보를 상상하고 잘 거야.’


수수가 두 발을 침대에서 내려 바닥에 서려는 그때, 악취 때문에 이미 지끈거리고 있었던 머리가 갑자기 하얘지면서 수수는 힘없이 고꾸라졌다. 흔들거리는 두 팔로 바닥을 짚어보니, 눈 바로 앞에 놓인 책에서는 코끼리가 수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수는 허리를 숙여 코끼리의 큼지막한 귀에 대고, “코끼리야, 넌 나를 도와줄 수 있니?”라고 속삭였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코끼리가 도와주지 않을 거라면, 나무늘보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만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나무가 하나도 없는 곳이라도 괜찮으니, 이곳만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수수는 급히 책을 덮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파들파들 떨리는 손은 겨우 책장 하나만 넘길 수 있었다.


시큰거리는 콧구멍이 괴물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수는 손을 책에서 떼고 두 눈을 가린 뒤, 꿇은 무릎 속으로 얼굴을 파묻혔다.


‘조금만 버티면 돼.’


그때, 괴물이 손가락으로 노라의 어깨를 푹 찔렀다. 수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지만,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괴물이 할 만한 행동도 아니었을 뿐더러, 느껴졌던 손가락의 두께가 너무 얄쌍했다.


수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의문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놀람으로 가득 찼다. 수수는 눈을 다시 감았다 떠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깜빡거려도 보이는 것은 그대로였다.


그것은 거꾸로 되어있는 원숭이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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