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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Mar 10.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10

10.


침대에 누운 수수는 혹여나 이번에도 책을 놓칠까봐 두 손으로 가슴팍에 꽉 쥐었다. 그러고선 꿈에 나와서는 안 될 무서운 것들을 최대한 빠르게 읊으며 상상했다.


‘거꾸로 매달린 귀신, 쥐가 꼬리 엄청 길고, 큰 벌레, 다리 백개 달린 지네, 칼 든 사람, 코로 숨 못 쉬기, 피에 젖은 이불, 눈알 쪼아대는 까마귀, 얼굴만 떠다니는 아기랑, 목 잘린 기린, 저승사자, 파란색 시체, 차에 치인 갈매기, 괴물 발가락, 어두운 방에 혼자 있는데 비명 소리 들리기. 자, 됐다.’


해야 할 일을 처리한 수수는 이제 자신이 정말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나무늘보가 내 얘기할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보는 거, 절대로 까먹으면 안 돼. 나머지 동물들은 그 말만 듣고 나를 도와주기로 찬성한 거니깐…….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 그나저나 오늘 만날 동물은 누굴까?’


수수는 팔을 펼쳐 얼굴 위로 책을 열었다. 동물들의 그림을 차례대로 찬찬히 살폈다. 수수는 그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이미 동물의 순서를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매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다음 동물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코끼리, 안녕. 원숭이, 안녕. 코알라, 안녕. 테이퍼, 안녕. 판다, 안-


삐-삐-삐-삐.


그 뒤로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책이 갑자기 손에서 빠져나와 펄럭거리더니, 수수의 얼굴에 철퍼덕 떨어졌다. 칠흑 같은 암흑이 드리웠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책의 무게가 홀연히 사라졌다. 커튼이 열리듯이 눈앞이 훤해지며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하!”


수수는 의기양양하게 숨을 내뱉었다. 책에 뭉개졌던 코가 조금 아리긴 했지만, 이토록 신나는 밤은 여태껏 없었다.


‘밤이 신나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야. 밤은 늘 무서웠는데 말이야.’


수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셔 풀냄새가 가득한 공기로 배를 꽉 채웠다. 오늘은 책 속에서 비가 왔는지, 잔디의 끝자락에 이슬이 송송 맺혀있었다. 발바닥을 스치는 촉촉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은근히 재미있어서 수수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깡충깡충 뛰었다.


‘어젯밤에도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들어와서 원숭이를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수수는 그날의 기억을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 빨리 고개를 털었다.


수수는 나무에 매달려있을 판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다 올려다보아도 판다든 누구든, 아무런 동물도 없었다.


수수가 조심스럽게 외쳤다.

“저기, 아무도 없나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신가요?”


그때, 다리를 스치는 작은 바람이 느껴졌다. 아래를 보았다. 웬 농구공처럼 생긴 것이 이리저리 회전하며 잔디 위를 구르고 있었다.


수수는 놀라서 숨을 “헙” 들이마시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뭐야, 아르마딜로구나!”


농구공이 구르기를 멈추었다. 수수의 기억이 맞는다면, 판다의 다음, 다음이 아르마딜로였다.


‘알겠다! 책이 촤르륵거리면서 내 얼굴에 떨어지는 동안, 페이지가 딱 두 장 넘어갔어. 그래서 판다가 아니라 아르마딜로의 페이지 속으로 내가 들어오게 된 거야.’


수수는 이런 어려운 추리를 단번에 해냈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했다. 그러나 전혀 반응하지 않는 농구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그 추리가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수는 허리를 숙여 농구공에게 물어보았다.

“맞지, 아르마딜로……?”


농구공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하네……. 책에서 본 아르마딜로랑 너무 비슷하긴 한데. 이렇게까지 안 움직이는 걸 보면 살아있는 동물은 아닌 것 같고. 진짜 그냥 공인가?’


수수는 농구공을 손으로 똑똑 두드렸다. 그 다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아르마딜로야, 한 번 나와 봐줄래?”


역시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농구공을 지켜보던 수수가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발로 한 번 세게 차보려는 찰나에,


“미안해.”라고 말하는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멈칫한 수수는 다시 허리를 숙여 귀를 공에다 바짝 갖다 댔다.


“미안해. 난 아르마딜로가 맞아.”


껍데기가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아르마딜로의 머리가 아주 조금 비집어 나왔다. 수수는 환희에 차서 번쩍번쩍 뛰며 아르마딜로를 반겼다.


“역시 맞았구나! 그런데 왜 자꾸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늦게 나와서 널 기다리게 했잖아.”

“에이, 별로 안 기다렸는데 뭘. 만나서 반가워! 난 수수야.”


아르마딜로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껍데기 속으로 쏙하니 들어갔다.


“응?”


수수는 의아한 마음에 아르마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가지? 나랑 이야기하기 싫은가?’


정적은 계속 되었다. 나무늘보도 반응이 느리긴 했지만, 이렇게 어딘가로 아예 숨어버리지는 않았다. 수수는 조금 초조해졌다. 기술을 배워야 할 시간인데, 이러다간 아무것도 안 하고 밤을 보낼 모양이었다. 그때, 목구멍이 살짝 시큰거렸다. 수수는 침을 꼴깍 꼴깍 삼켜서 통증을 없애려 노력했다.


‘어제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서 목이 쉬었나봐. 백번은 넘게 연습했으니깐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그렇게 해서 목소리가 엄청 커지긴 했어. 원숭이를 또 만나면 꼭 고맙다고 말해야지. 그런데 또 만날 수는 있겠지? 원숭이는 정말 말이 많긴 한데, 그래도 재미있었는데…….’


회상에 잠긴 수수를 갑작스럽게 깨어낸 건 옆에서 들리는 바스락 소리였다. 여전히 껍질 속에 들어가 있는 아르마딜로가 드디어 나오려다가 주춤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언제 나오려나? 아, 맞다. 나무늘보가 나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도 물어봐야 되는데! 어떡하지? 계속 이러면 진짜로 시간이 부족할 텐데…….’


수수는 입을 삐죽 내밀며 아르마딜로 옆에 앉았다. 비에 젖은 잔디에 잠옷 바지가 점점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수수는 아직까지도 아무 말 없이 동그랗게 말려있는 아르마딜로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지난밤에 수수를 거꾸로 내려다보았던 원숭이의 얼굴이 생각났다. 수수가 눈물을 보이자 쩌억하니 벌려졌던 어마어마한 입도 떠올랐다. 그 기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렇게 말 많은 원숭이도 나를 한참씩이나 기다려줬는데. 나도 기다려줘야지. 시간은 충분해. 아니면 뭐, 내일 또 만나면 되지.’


수수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마딜로야, 천천히 나와도 돼. 그래도 나오기 싫으면, 음, 아! 그 안에서 말을 해줘. 그래도 내가 들을 수 있을 거야.”


껍질 안은 다시 또 바스락거렸다. 수수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조그마한 목소리가 껍질을 뚫고 수수의 귀에 가까스로 닿았다.


“고마워.”


수수는 벅차오르는 기쁨에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었지만 아르마딜로를 놀라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괜찮아! 대답해줘서 내가 더 고마워.”


아르마딜로는 껍질 속에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응, 너는?”

“오늘 너한테 구르는 기술을 알려줄 거야.”

“아, 정말? 그런데 사실 너를 보자마자 대충 알고는 있었어. 왜냐하면 너만큼 그 기술을 잘해내는 동물도 없을 걸? 아까 전에는 네가 진짜 공인지 잠깐 헷갈릴 정도였다니깐. 있잖아, 아까 전에 하마터면 내가 널 발로 차버릴 뻔했어.”


수수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껍질이 천천히 열렸고, 아르마딜로는 딱 눈이 보일 정도만 고개를 내밀었다. 아르마딜로의 얼굴을 처음 보게 된 수수는 그 귀여운 생김새를 보고 단숨에 아르마딜로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다. 이마를 두른 두꺼운 껍질 옆에는 똘망똘망한 두 눈이, 그리고 밑에는 앙증맞은 분홍색 코가 살짝 보였다.


“아르마딜로야.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아르마딜로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나무늘보가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너희한테 말했다고 들었어. 그러고 나선 투표를 했다며?”


아르마딜로가 고개를 한 번 더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때 나무늘보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했어?”


질문이 어려웠는지, 아르마딜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 고개를 약간은 더 앞으로 뻗었기 때문에 수수는 아르마딜로의 길쭉한 코끝에 달린 콧방울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났다. 수수는 허리를 밑으로 기울여 아르마딜로가 대답하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몇 분이 지났는지 수수는 알지 못했다. 기다림에 지친 수수가 꽤나 재밌는 할 일을 찾아서 거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마딜로의 등껍질은 화장실 바닥처럼 네모난 조각들로 꽉 차있었는데, 그게 전부 몇 개 있는지 세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도 네모들이 많아서 중간에 자꾸만 숫자가 헷갈렸다. 그래서 수수는 서른넷까지 갔다가 또 한 번 처음부터 세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드디어 아르마딜로가 입을 열었다.


“나무늘보는 우리 책의 표지에 있는 동물이잖아. 그래서 나무늘보는 모든 걸 관찰할 수 있어. 아주 옛날부터 나무늘보는 매일같이 널 봐왔어. 네가 밤마다 소리도 못 내고 울던 모습을 우리한테 설명해줬어. 우리는 알거든. 슬퍼하는 동물은 착한 동물이라는 걸. 사람도 같을 거라고 나무늘보가 말했어. 그래서 우리는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사실 여기 있는 동물들은 거의 다 사람을 무서워해. 사람 때문에 우리 가족을 많이 잃었거든. 그래도 나랑 다른 몇몇 동물들은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을 거라고. 게다가 나무늘보는 괴물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도 말해줬어. 우리의 가족들이 당했던 일들을 너도 당하고 있잖아. 우리는 네가 그만 아프기를 원해.”


아르마딜로의 껍질에 ‘톡’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떨어졌다. 곧 ‘톡,톡,톡,톡’ 소리가 나며 껍질 위에 물방울이 쏟아졌다. 그것은 비가 아니라, 수수의 눈물이었다. 아르마딜로는 몸을 펴고 고개를 완전히 뻗었다. 그러고선 수수에게 기어갔다. 눈물을 막으려 얼굴을 잡고 있는 수수의 손 안을 파고들어 거기에 머리를 살포시 기댔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는 수수를 아르마딜로는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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