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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울 Mar 10. 2023

수수와 일곱 마리의 동물들 - 11

11.


창밖은 어둑했는데도 수수는 침대에 누워있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져 있었다. 방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좋아. 이대로만 하면 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고 누워야지.’


수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쪼그려 앉더니, 냅다 구르기 시작했다. 방바닥에 어지럽혀 있는 쿠션과 인형들을 요리조리 잘 피해 가다가, 반대편 벽에 부딪힐락 말락 할 때쯤 딱 멈추었다. 수수의 코와 벽 사이의 간격은 단 5cm도 되지 않았다.


“아싸!”


환호성을 내뱉자마자 시계를 확인하고 황급히 바닥을 정리하는 수수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라있었다. 수수는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무서운 것들을 상상해야 했지만, 우선 어젯밤의 수업을 ‘복습’해야 했다.     


...


“잘 들어봐, 수수야. 기억에 잘 새겨놔서 매일 복습하는 게 좋으니깐.”

“복습이 뭐야?”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수수를 위로해주며 모든 경계심을 내려놓은 아르마딜로는, 이제 또렷해진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복습은 뭐냐면, 뭘 배운 다음에 그걸 까먹지 않게 다시 연습해보는 거야.”

“아, 알겠어! 근데 나 원래 잘 안 까먹어.”

“다행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잘 들어봐. 아르마딜로 중에서도 나처럼 껍질이 세 번 접히는 아르마딜로만 이렇게 몸을 꾸길 수 있어.”

“정말? 그럼 다른 아르마딜로는 그렇게 못해?”

“응. 예전에 껍질이 아홉 번 접히는 아로마딜로를 만난 적이 있는데, 걔는 한 번도 굴러본 적이 없대.”

“아홉 번씩이나? 그럼 넌 딱 세 번 접히는 껍질이 있어서 구를 수 있는 거구나! 그런데 나는 아예 껍질이 하나도 없는데 너처럼 구를 수 있을까?”

“당연하지! 아까 전에 네가 울 때 말이야, 그때 몸을 웅크리고 있었잖아. 그 자세에서 조금만 더 몸을 작게 말면 구를 수 있어.”


수수는 곧바로 시도해보았다. 몸을 한껏 조그맣게 만들고 목도 그 안으로 최대한 집어넣었다.


“이렇게?”

“맞아! 잘했어.”

“이건 쉽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건 이제 내가 가르쳐 줄 거야. 이제 다시 몸을 펴볼래?”


수수는 목과 허리를 쭈욱 폈다. 잠깐 동안만 움츠리고 있었는데도 몸이 조금 뻐근했다.


아르마딜로가 말했다.

“네가 몸을 둥글게 말기 직전에 아주 잠깐의 시간이 있잖아. 그때, 빨리 주변에 뭐가 있는지 기억해 놔야 해. 잘 봐.”


아르마딜로는 긴 손톱으로 그들을 둘러싼 나무들을 하나하나씩 가리켰다.


“저기 나무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루 있지? 위치가 어디인지 살핀 다음에 기억해 두는 거야. 지금 해볼래?”

“알겠어. 왼쪽에 하나, 앞에 하나-”

“그렇게 하면 헷갈릴 거야. 왜냐하면 네가 계속 구르면 왼쪽 오른쪽이 달라지거든.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거라고 생각해봐.”

“아, 사진 찍듯이?”

“그게 뭐야?”

“아니야. 그럼 그림으로 기억해 볼게.”


수수는 한 바퀴 돌며 여섯 그루의 나무들의 위치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다 했어!”

“그래. 그러면 이제 몸을 말아서 나무 사이사이를 굴러 볼 수 있겠어? 여섯 그루 모두.”


수수는 입을 꽉 깨물고 몸을 말았다. 그러고선 그림으로 포착한 나무들의 위치를 하나씩 돌이키며 생각해놓은 경로대로 굴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수수는 실실 웃으며 뒤통수를 문질렀다. 아르마딜로는 서둘러 굴러 와서 수수를 토닥여주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려워. 그런데 하다 보면 점점 감이 올 거야. 다시 해볼래?”

“응! 다시 해볼게.”


그렇게 수수는 몸을 만 상태로 나무들 사이를 굴러다녔다. 대여섯 번 정도 충돌이 있고 난 이후, 수수는 잽싸게 나무들을 피하면서 꽤 빠른 속도로 구를 수 있게 되었다. 아르마딜로가 박수를 치니깐 단단한 손톱들이 서로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너 손톱 되게 길다! 멋있어!”


아르마딜로는 수수의 칭찬에 수줍게 쭈뼛거리다가, 돌연히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뭔데?”

“기다려봐.”


아르마딜로는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굴러갔다. 그러더니 박박 소리를 내며 손톱을 앞뒤로 바위에다가 갉아댔다. 수수는 기겁을 하더니 곧장 아르마딜로에게 달려가 팔을 잡아 올렸다.


“너 왜 그래! 아프지 않아?”


수수는 허둥지둥 아르마딜로의 손과 팔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피는 안 났는지 확인했다. 아르마딜로는 수수의 이런 반응에 숨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다.


“바보야! 하나도 안 아파!”


수수는 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아르마딜로의 손에 호호 바람을 불어댔다. 아르마딜로는 반대편 손을 들어 수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잇! 왜 그래!”


수수는 황당해하며 자신의 볼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아르마딜로에게 해명을 바라는 눈빛을 쏘았다.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깐. 너도 손톱 매주 자르지?”

“응! 엄마가 일요일마다 잘라줘.”

“그때 안 아프지?”


수수는 잠깐 생각하다가, “그러네?”라고 대답하며 머쓱하게 웃었다.


수수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진 아르마딜로는 순식간에 손톱을 잘라냈다. 그 손톱은 수수의 검지만한 길이였다.

아르마딜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손톱을 내밀어 수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 구른 다음에, 괴물의 발을 이걸로 찌르는 거야.”


아르마딜로는 또다시 어디론가 굴러가더니, “이리로 와봐!”라고 소리쳤다. 수수가 따라 걸어가려고 하자, “아니, 굴러서 와봐!”라고 또 소리쳤다.


수수는 눈앞의 풍경을 머릿속에 저장한 뒤, 아르마딜로를 향해 굴러갔다. 아무 것도 치지 않고 부드럽게 떼굴떼굴 잘 굴러가다가, 제때 멈추지 못해 아르마딜로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더 연습하면 돼.”


그렇게 수수를 다독여준 후, 아르마딜로는 자기가 자른 손톱을 그들 앞에 있는 나무 둥치에 힘껏 내리꽂았다.


“흐어!”


수수는 기겁했다. 나무 둥치를 내려다보니 커다란 틈이 생겨있었다.


“이걸 들고 괴물의 발까지 굴러가. 바로 앞까지. 그 다음에 발등에 이걸 찍는 거야.”     


...


복습을 끝낸 수수는 오른쪽 주먹 안에 아르마딜로의 손톱을 쥐고 만지작거렸다.


‘소리 지르기. 구르기. 찌르기.’


순서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수수는 계속 이 단어들을 속으로 반복했다. 엄마가 가르쳐준 ‘시장에 가면’ 게임이 떠올랐다.


“시장에 가면, 토마토도 있고. 시장에 가면, 토마토도 있고, 사과도 있고.”


‘난 똑똑해서 시장에 가면 게임도 잘하니깐 이것도 잘 외우겠지? 몇 개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리 지르기, 구르기-’


그때, 삐..........

삐..........


수수는 바닥에 앉은 채 그대로 얼었다. 수수의 방안의 형광등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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