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대림절 첫 번째 주 수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 (4)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서 6:9-13, 공동번역)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누가복음서 11:1-2)
긴 말 필요없다, 이렇게 해라! 이 안에 다 있다, 더 무엇을 넣을 것도 없고, 더 무엇을 뺄 것도 없으니,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그야말로 ‘기도의 공식’, ‘주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만 하면 됩니까? 기도가 이렇게 쉬운 것이었습니까? 기도가 너무 간단한데 . . .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가르쳐주신 기도가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요?
우리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기도일까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마 26:39)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있어 달라 부탁하신 후,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땅에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근심과 번민에 싸인 그 괴로운 속내를 아버지 앞에서 조금도 감추지 않으시는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내 뜻을 고집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고자만 하시면 될 일이고, 아들인 내가 피하고자만 하면 피할 수 있는 있는 일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는 아들인 나는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며 나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기도, 나를 비우는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모른 척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뜻을 바꾸시라 간청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 아버지의 뜻을 내 입으로 되뇌고 또 되뇌고 마침내 나의 뜻이 되는 기도입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 26:40-41)
기도를 마치시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도대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우리는 너무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몸은 잠들기 쉽고, 마음 역시 못지 않게 잠들기 쉬우니 더욱 우리가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그 마음을 다잡게 해달라고 그 마음 깨어 있게 해달라고 또한 그 몸 또한 매일 매일 ‘필요한 양식’으로 다독여 달라고, 그래서 ‘주의 기도’는 약한 우리가 강하신 하나님께 도움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 ‘주의 기도’는 혼자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신 그 ‘예수와 함께’ 깨어 있어 ‘함께하는’ 기도입니다.
잠든 제자들을 뒤로하고 예수께서는 다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도, 다른 기도가 아닌 같은 말씀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한 번도 아니고 같은 기도를 하고 또 하십니다 (마 26:42, 44).
다르게 더 새롭게 더 뭉클하고 더 절절하게 더 재치있고 더 아름답게, 그리고 무엇보다 더 감동적으로 그래야 더 들어주실 것 같아 기도를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궁리하며 남들 보다 그리고 이전 보다 기도를 더 잘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같은 기도를 하고 또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길지 않고 곁가지 없는 ‘주의 기도’를 하고 또 합니다. 반복하는 기도에 설사 나는 지루할진 몰라도 들으시는 분은 이번이 처음이란 듯, 마치 겨우 말문을 뗀 아기의 흐릿한 ‘음마’ 소리 듣는 것처럼 항상 반갑고 새롭고 또 기쁘게 들으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십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달아 못을 박고 온갖 모욕과 조롱하는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여전히 당신 눈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언제 그 죄 짓는 일을 멈출지 알 수 없는, 아니 아예 멈출 생각 조차 하지 않는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는 것이, 우리가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사실 누구를 용서하는 일도 누구로부터 용서받는 일도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주의 기도’를 합니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눅 23:43)
그 와중에도 옆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께서도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하실 텐데 옆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인를 위로하십니다. 그렇게 ‘주의 기도’는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시며, 그 ‘우리’ 아버지의 나라는 혼자가 아닌 ‘우리’가 ‘함께’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로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어둠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지금 여기 나의 곁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 나를 버리신 하나님,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예수께서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어디계십니까? 절규입니다. 그러나 기도입니다. 참 아픈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의 기도’가 우리를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 (요 19:30)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눅 23:46)
체념의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에 맡긴 아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아들의 기도, 하늘 나라의 겨자씨가 되어 땅에 뿌려진 아들의 기도입니다 (마 13:31).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 만큼 여기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아버지의 그 나라가 여기에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아들, 마침내 이루어지는 그 뜻, 마침내 오는 그 나라를 지금 눈으로 보는 아들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주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여기 이 땅에 그 뜻이 이루어지고 그 나라가 오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 겨자씨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어떻게 기도할까?’ 가 아닌 ‘이렇게 기도해라!’ 하는 ‘기도의 공식’입니다. ‘주의 기도’는 ‘어떻게 살까?’ 가 아닌 ‘이렇게 살아라!’ 하는 ‘삶의 공식’입니다.
그 기도를 가르치셨던 예수, 가르치신 그 기도를 죽기까지 죽음의 순간까지 온 몸으로 하셨고 사셨던 예수.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가 되신 예수. 그 분께서 몸으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 그 분의 삶인 그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그 분을 기다립니다.
삶의 기도를 하고 기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는 오늘도 ‘주의 기도’를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