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대림절 첫 번째 주 토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7)
“바리새파 사람들이 . . . 예수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과 어울려서 음식을 드시오?” 예수께서 . . .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서 9:9-13)
참 질문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늘 질문을 하거나, 몰래 엿듣거나 훔쳐보거나, 아니면 불평불만에 투덜거리거나 하면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감시하고 관찰하는 무슨 사생팬도 아니고, 아무튼 열심히 그러나 다른 이유로 예수를 따라다닙니다. 그런 저들이 질문들을 하도 해대니 예수께서 질문을 듣다 듣다 한 번은 이러셨습니다. ‘성전 정화’** 후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누구보다 질문하기 좋아하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께 다가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어디 우리에게 말해 보십시오.”
이번에는 예수께서 그냥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다. 대답해 보아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질문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받는 것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성전 안에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대놓고 질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누군데,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데, 설마 이런 질문이 나올 줄이야. ‘하늘에서 났다’ 고 말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났다’ 고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따르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돌로 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린 모르오.”
“그럼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누가복음서 20:1-8)
지금 여기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가셔서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 그리고 그 예수를 못마땅해 하는 역시 질문하는 걸 남 못지 않게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 그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제가 조금 바꿔 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불평에 불만에 약간의 항의도 섞였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겁니까?”
“무슨 말이냐?”
모르시는가 봅니다.
“아니 저들과 말을 섞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저들의 집에까지 가셔서 저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고 계시니,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럼 너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네?”
그들은 이게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묻습니다.
“왜 너희들은 나처럼 하지 않느냔 말이다.”
그들은 아직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여긴 죄인의 집입니다. 그것도 온통 죄인들로 꽉찬 죄인의 집.”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들은 왜 너희들이 말하는 저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느냔 말이다. 왜 나와 같이 들어가서 먹고 마시지 않느냔 말이다.”
예수께서도 답답하시고 그들도 답답합니다. 옆에서 듣는 우리들도 답답합니다. 그리고 저기 집 안에서 이 모든 대화를 듣고 있는 죄인들 – 정말 죄인도 있을 것이고, 하루 아침에 죄인이 되어버린 이들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인정하는 죄인들도 있을 것이고, 그냥 그렇게 죄인이라 불려도 그만인 이들도 있을 것이고, 난 전혀 아닌데 억울해 하는 죄인들도 또한 있을 겁니다 – , 그들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듣는 죄인 입장에서 이 대화에 끼기도, 그렇다고 모른 척 하기도 그렇습니다.
“저들은 죄인입니다 선생님. 우리가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립니까?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다니요 그것도 죄인의 집에서.”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 아니냐,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고.”
“선생님 만약 우리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유유상종이라고 할 겁니다. 우리더러 죄인이라고 부를게 뻔합니다. 졸지에 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유상종이 맞다. 그런데 사실 너희들은 저들보다 더 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으니, 어깃장 그만 놓고 나랑 같이 들어가자. 들어가서 저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먹고 마시자.”
혹 떼려다 되레 혹 몇 개 더 얻은, 그만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가는 동화 속 그 못되고 못난 영감님 심정이 이런 심정이었을까요?
여기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 소외와 멸시를 받는 사람들, 그들 곁으로 가시는 예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영 탐탁하지 않은, 그래서 많이 불편하고 못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같은 이유인데 그에 따르는 행동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 결말도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옆과 뒤를 돌아보는, 그리고 내 속 안을 들여다보는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 여기서 ‘죄인’ 혹은 ‘죄’라는 것은 일반적인 사법적 의미 뿐만 아니라 종교적 율법적 의미를 모두 포함한 말입니다.
** 성전 정화,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사고 팔고 환전도 하는 그 꼴 차마 볼 수 없으셨던 예수께서 좌판들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밖으로 내쫓으신 조금 많이 심각한 사건입니다. (마 21:12-17; 막 11:15-19; 눅 19:45-48; 요 2: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