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遊)신부의 대림절 ‘함께 걷는 기다림’
대림절 두 번째 주 월요일, 기다리며 읽는 마태복음서 (9)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복음서 11:3)
“오신다는 분이 당신이십니까? 정말 당신이 오신다는 그 분 맞습니까?”
가슴 속 한 켠에 꼭꼭 눌러 놓았던 질문입니다. 정말 꼭 한 번은 묻고 싶었던 그 질문입니다. 얼마동안이나 이 냄새나는 감옥에 갇혀 있었는지 이제 요한은 기억을 할 수 없습니다. 감옥 밖의 기억은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여기를 살아서 나갈 가망이 없다는 것도 요한은 이제 조금씩 깨닫습니다. 더 이상 버틸 기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구하러 올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제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알고나 죽자. 죽기 전에 물어보기라도 하자.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이, 기다리며 했던 그 일들이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괜한 헛짓 헛고생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는지, 나는 나의 삶을 제대로 살았는지 알아야겠다. 오신다는 ‘그 분’을 위해, 정말 ‘그 분’을 맞이하는 그 길을 조금이라도 내가 열었는지, 그리고 ‘그분’이 정말 ‘그분’ 맞는지, 난 알아야겠다.”
“당신이 그분이십니까? 맞습니까 당신이? 아니면 다른 분을 또 기다려야 합니까?”
어제도 기다렸고 오늘도 기다리고 아마도 내일 역시 기다리고 있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들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고도(Godot)는 올 기색이 없고,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겠고, 사실 그 고도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들이, 그 기다림의 현실이 너무 웃기고 먹먹했었습니다. 대학시절 안 보면 간첩이 되는 것도 아닌데 워낙 대학가 어디에나 조금만 주위를 돌아보면 어딘가에 늘 붙어있던, 이게 나무인가 싶을 깡마른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포스터, 그리고 누구 이름인지 무슨 섬(島) 이름인지 아니면 어떤 산의 높이 혹은 비행기가 떠있는 그 높이를 말하는지 몰랐던‘고도’라는 단어에 이끌려 지하 소극장에서 보았던 연극. 부조리라는 단어, 부조리극이란 장르를 저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던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자신이 묘사한 그 부조리한 세상, 그 자신 또한 그 일원으로 살아가느라 고단해서 그런지, 그렇게 사는게 속상해 그런지. 뭔가 알아내겠다며 들여다보는 그 두 눈과 생각의 고랑처럼 깊어진 주름진 얼굴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그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고도(Godot)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의 말이 걸작입니다. “내가 그걸 알면 이 극을 썼겠습니까?” 우문(愚問)에 베케트다운 현답(賢答)입니다. “그럼 혹시, ‘신’이 맞습니까?” “. . . 글쎄요, . . . 그럴 수도, . . . 아닐 수도, . . .”
사는 이유, 의미, 목적, 방향, 가치, 그것들을 찾을 희망 조차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사는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사는 목적을 알 수 없고 그래서 사는 길을 잃은 사람들. 마르고 척박한 땅, 탁하고 검은 물가에서 살아가는 양들을 ‘푸른 풀밭, 맑은 시냇가’로 이끌 ‘목자’를 언제 오는지도 알 수 없고, 오긴 오는 건지도 알 수 없고, 기다리는 그 분이 사실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 기다림 만큼 절망적인 기다림이 또 있을까요?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는 지나갔고 그럼 이제 우리는 황금 시대를 사는 건가요? 아니면 곧 올 황금 시대를 기다리는 건가요? 우리는 지금 희망의 시대를 사는 건가요, 상실의 시대를 사는 건가요? 예전에는 상실의 시대였고 지금은 희망의 시대인가요? 아니면 하루키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 후반의 그 때가 상실의 시대였나요? 아니면 하루키 현상이 한창 일었던 한국의 80년대 후반과 90년대 – 2000년대 역시 그랬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 가 상실의 시대였을까요? 그럼 지금은 아닌가요? 희망의 시대가 우리 인간에게 언제 있었기는 했었나요? 아니면 그 희망의 시대는 아직이고,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그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누군가에게 상실의 시대는 항상 있어 왔고, 또 누군가에게 희망의 시대는 늘 있어 왔습니다. 지금도 누구에게는 상실의 시대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희망의 시대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두 시대를 오락가락 하면서 살아 왔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한 쪽을 잘 선택해서 제대로 살려고 정말 노력중입니다.
아마도 베케트는 그런 저를 부조리한 시대에 부조리한 인생을 사는 매우 부조리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부터 베케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베케트 본인은 – 물론 이미 고인이 된 베케트가 제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 여전히 자신이 살던 그 시대가 부조리의 시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그 부조리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는지.
기다림은 지난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누구’를 ‘왜’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기다린다면 그건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절망이고 뭐고 상실이고 뭐고 할 그 뭣도 없는 그냥의 고통입니다.
저는, 그리고 우리는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고도(Godot)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도(Godot)는 어떤 고도(Godot)일까, 궁금해지는 계절입니다.
저는 이분을 기다립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요한계시록 22:20)
* 원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는 한 동안 그 원래의 제목을 ‘상실’한 채 <상실의 시대>로 출간되었습니다. 지금은 원래의 제목으로 출간된다고 합니다. 그 동일한 책을 저는 <상실의 시대>로 읽었으니 저에게는 원래의 제목을 잃어버렸었다는 상실감이, 사실 제 마음에는 더 들었던 그 제목이 지금은 원래의 제목으로 고쳐지는 바람에 사라져 버렸다는 상실감이 동시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