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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ar moon Oct 21. 2023

청춘이라는 잔혹한 찬란

청춘의 그늘로 현재가 보이지 않을 때


 청춘은 잔혹하고도 찬란하다. 이에 놓인 자들은 자신이 언제부터 청춘이라는 덫에 걸려있는지 조차 모른 채 무겁지만 빛나는 덫을 등에 지고 일단 앞으로 달려 나간다. 



청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내야 할까 


 청춘이라는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상당히 부담을 준다. '청춘'이란 단어는 젊음의 생기를 가득 담아 은은한 광채로 아름다움을 발산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 빛나는 단어가 자신의 이름이 되어도 될까 싶은 의문과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동반한다. 


 청춘의 한가운데 서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자 부담감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야만 할 것 같고, 지금 하는 일에서 빠르게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쓸모없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리는 것 같았다. 

정작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어떤 것을 할 때 삶을 향한 의지가 샘솟는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물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하지만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에 의해하는 것,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서 어쩔 수 없이 즐기는 척하고 있는 것이라면 금세 일을 지속할 힘이 동나버리고 만다. 

 

가끔 '청춘'은 젊은이들을 청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넣어놓고 늘 푸르고 아름다워야 가치 있는 삶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허상처럼 느껴진다. 


김연수 작가의 책 <청춘의 문장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청춘이란 시간이 아주 많이 남은 상태, 그래서 뭔가에 그 시간을 쏟고 나면,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시간만 흐른다면 저절로 끝나게 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생각해요. 해서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을 때는 청춘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노랫말처럼 젊을 때는 젊음을 몰라요. 인류가 계속되는 한, 청춘의 무지는 반복될 뿐이에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 대충 살아도 됩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기도 하고, 그냥 시간만 보내기도 하고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너무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잖아요. 젊었을 때는 천 년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으면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요."

'청춘의 무지'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청춘을 살고 있지만 살아도 여전히 그에 관해 무지하다. 

청춘이 다 지나고 나서야 청춘을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청춘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과 같은 말로 들린다. 청춘은 생각하고, 경험하고, 신경 쓸게 점점 늘어나 정작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색을 자꾸만 다음 순위로 미루게 된다. 


 청춘을 살지만 매체에서 나오는 젊음의 이미지와 자신의 모습에 상당한 거리감을 느낀다. 

낭만 가득하고, 하고 싶은 것에 당당히 도전하며 무엇보다 여유가 있는 상태로 묘사된다. 정작 나 자신만 보아도 그렇지가 않다. 특히 가장 슬프게도 '여유'가 없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시간적 여유, 공간적 여유, 경제적 여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점점 감흥이 사라지며 자신에 대한 여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여유와 관용을 배푸는 것이 인색해진다. 



유년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차곡차곡 읽어간 아멜리 노통브의 책들


 책을 읽는 것은 인생에 관한 이렇다 할 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젊은이의 아이러니와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멜리 노통브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책에서는 유년시절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유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통찰을 자서전으로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에서는 3살의 작가가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은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묘사한다. 이를 읽어가며 유년의 신비함을 느꼈다. 또한 이 3살의 아이는 나의 유년을 돌아보게끔 했다. 


 그러나 유년을 떠올리려 하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점점 무수한 '나'의 형태 중 하나인 유년시절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안 그래도 공허한 속이 더욱 공허함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되돌아볼 순간조차 잊게 만든 정신없이 바쁜 삶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때, 청춘의 시기를 재정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을 치열하게 알아가는 시기로 말이다. 


 성인이 되어 유년을 추억하는 것과 성인이 되지 않은 상태로 유년을 추억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발자국을 남겼던 유년과 발 딛고 서있는 청춘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해야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유년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여러 자아를 인정하며 통합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이러한 기록은 잘난 청춘이 자꾸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집요하게 캐물을 때 보내는 답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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