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너머
비전공자 배우로 외로움을 느꼈던 음지는 ‘동무’가 없는 땅이었다. 고정과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외줄 타기 길과 같은 배우의 길 위에서 복리이자처럼 불어나는 불안을 모래주머니처럼 메고도 이 감정을 나눌 귀와 입이 없는 것부터 조언이나 질문의 삽을 매 순간, 퍼낼 자리부터 알아봐야 한다는 것까지 관계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개성 있게 세우게 만드는 길을 걸어가게 했지만 그 길을 꽤나 돌아가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같은 학번의 동기를 부를 수 있음을 부러워했고 선후배를 가지고 싶어 했다.
나에게 ‘동지’는 외부의 워크숍을 듣기 시작한 것과 함께 찾아왔다. 각자의 동기는 달라도 목적은 닮아있는 한 공간 속에서 서로의 실력과 성장을 공유하다 보면 동지애가 피어났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짧게는 이주, 심지어 줌 안에서도 따뜻한 기운이 돌고 돌았다. 한시적인 워크숍은 짧고 굵게 필요한 것들을 나누고 깔끔하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연결감으로 머무는 양지의 온도는 따스하게 느껴졌다. 동지가 생겨서 좋은 점은 연기얘기를 눈치 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점과 연기 얘기를 같은 언어로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나의 메소드 아래에 있는 동지들은 세계관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자유로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수다에 목말라 있던 나에게는 그 순간은 옹달샘과 같았다. 설명이 없이 언어가 날뛰는 대화의 운동장이 얼마나 행복한지!
‘구름처럼 연기해 주세요.’
하늘색처럼 움직여주세요.’
추상적인 연기 주문이 오더라도 배우라면 응당 알아 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대대로 이어져 왔다. 나 역시 찰떡처럼 알아듣는 배우가 되어야겠단 복종적인 다짐을 마음 한편에 세워둔 적이 있었다. 최태성 작가의 <최소한의 한국사>에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상상력을 심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과 함께 상상력이 부족하면 자꾸 실수를 하게 된다고 했다. 내가 이런 선택을 해도 될까?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맞을까? 이런 생각을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역사라는 말처럼 배우는 감독이 하는 어떤 주문에도 즉각적으로 표현을 해야 하며 누군가가 해냈다는 신화적 서사가 내려오면서 이를 주장하는 곳에 힘이 실어진 것 같았다, 당연하듯이.
사람마다 바라보는 구름의 인상이 다르고 하늘색의 명도가 다른데 단번에 해내는 능력이라 하면 영적인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허무맹랑한 주문에도 나올 수 있는 음식의 실체는 실제로 존재했다. 옆 동네에서 해내었다는 뜬구름 같던 소문은 정말 사실이었다.
2016년 패기와 당당함으로 할 말은 하던 5년 차 때 나는 “주연같이 연기하지 마. 그냥 해, 막 해!”라는 감독님의 말에 손톱을 드러냈다.
“감독님, 어떻게 배우한테 그렇게 말을 하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연기를 그냥 해요! 저 상처받았습니다!”
내가 쓰고도 귀여운 이 말속에 복잡한 진심이 담겨 있다는 걸 감독님은 알았던 것 같다. 감독님은 즉각 푸근한 할아버지의 음성으로 자신의 언어를 풀어내는 노력을 보여주셨다. 시간이 흘러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고 난 이후에야 말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때에도 감독님에게 설득된 나는 감독님의 언어의 ‘그냥’ 이 담긴 연기를 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복도에 서서 꽤 많은 사람들을 스쳐 보냈다. 소통은 마침표 하나로 될 수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소통은 안일함 과는 어울리지 않는 온도라는 걸, 부드러운 잡음과 사랑의 집요함으로 다투어야 얻어지는 것이라는 걸 배웠다.
우리 모두는 한글을 사용하고 있을 뿐,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한글이 지닌 아름다움에 빚을 지며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일을 습관처럼 하고 있다. 모래알 속에서 찾은 진주 같은 관계는 언어의 통로를 나란히 걷게 되면서 쌓인 신뢰의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말속에 있는 하드디스크를 맞지 않는 나의 뇌와 결합시키는 노력과 시간이 모래성처럼 쌓여야 만 한다. 첫째로 자신의 영혼을 속이지 않아야 하며 둘째로 그 말을 나만의 언어로 배설하지 않아야 한다. *훈민정음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음을 딱하게 여긴 마음으로 탄생한 글자이다. 한글의 올바른 사용법은 어쩌면 내 뜻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글자를 듣는 일은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 위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야 비로소 서로를 오해하는 일이, 한 민족의 언어가 칼이 되어 서로를 다치게 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소통의 부재가 음지로 데려간 올해의 겨울이 몹시 춥게 느껴진다.
당신의 ‘하늘색’을 알아듣기 위하여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둔다. 부디, 당신의 소리에 내가 닿기를 바라며, 우리의 말이 침묵 속에서도 이어지길 바라며.
*출처 <최소한의 한국사> 최태성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