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 못한 미제사건이 되어
8평 정도의 공간 속에 덩그러니 서 있어 봤나요? 앞에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있고 그 사람들은 동시에 나만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너는 왜 안 들어?"
11년 전의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 날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사실 내 꿈은 배우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무대에 서는 걸 좋아했고 꾸준하게 내가 설 수 있는 무대를 찾아다니다 보니 우연한 기회를 만나 어느 소속사의 전속배우가 되어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손에 대본이라는 게 쥐어져 있는 그런 상황에서, 그러니까 나는 연기가 뭔지도 모르고 어떤 배우가 되고야 말겠다는 호기로운 목표도 없이 연기선생님께 이 말을 듣고 있었던 거다.
연기선생님 : "너는 왜 듣지를 않니?"
나 : "네?? 저 듣고 있는데요?????"
연기선생님 : "아니? 너는 전혀 듣.고.있.지 않아!"
무슨 기가차는 소린인지. 나는 귀가 있고 청력이 살아 있는데 듣지를 않는다니. 부가적인 설명도 없이 나를 이해시키려는 정성도 없이 내뱉는 말을 듣는데, 와 순식간에 바닥으로 끌려들어 가 짓밟히는 기분이었다. 무시무시한 무시를 당하면 용암 같은 분노가 생긴다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눈에 물이 차 올라서 눈을 더 크게 떴다. 여기서 울면 내가 질 것 같았다. 이십 대의 젊음이란 이름으로 자존심을 꿋꿋하게 지켰다. 가까스로 수업을 마친 뒤에 당당하게 연습실로 올라가 혼자 울었다. 그렇게 나의 객기가 시작됐다.
(*꿋꿋-하게 : 마르거나 얼어서 어느 정도 굳다)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어!
태어나 처음이었다. 무언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알아내고자 했던 건. 26년간 무대와 조건 없는 사랑만 하던 나에게 난생처음 방해자가 나타난 것이다. 솔직히, 지금에서 생각해 보면
'선생님,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죠?'
라는 한마디면 됐다. 그랬다면 8개월의 시간을 단축시키고도 아니, 어쩌면 10년의 세월이 지금과 다르게 흘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객기를 부린 덕에 운명적으로 그를 만나게 된 것도 있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하나를 쥐면 하나를 내어주어야 한다 하지 않는가. 두 손을 꽉 쥐고 있으면 다른 무엇을 절대 잡을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비전공자 신분이기에 주변에는 도움을 청할 배우나 연출 등의 지인은 당연히 없었다. 스스로 찾아낸 방법이란 '무조건 많이 보기'였다. 꼬박 8개월을 집에 틀어박혀 영화만 봤다. 이런 노력을 하는데도 연기를 보는 눈이란 놈은 눈곱도 비추지 않았다. 정말이지, 보고 또 봐도 나에게 듣는 법을 친절히 알려주는 영화나 배우는 없었다. 그런데 영화는 재밌었다. 자연스럽게 영화를 좋아하게 됐다. 힘이 잔뜩 들어간 내 눈을 울게 만들고 웃게 만들고 동공이 커지게 만드는 모든 감정들이 영화라는 세상 안에 가득했다.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 처음 만나는 세상이었다. 봐도 봐도 줄지 않는 명작들은 마치 알라딘의 보물창고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는 한 달에 한 배우의 작품들을 모아서 보기 시작한 지 여덟 번째가 되던 달에 운명적으로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바로 '히스레저'였다.
그도 분명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의 눈에서는 진짜 사랑이 느껴졌다. 그가 눈으로 나에게 들려줬다. 이 여자를 얼마만큼 사랑하고 원하는지, 나에게 분명하게 들렸다. 뭐지? 이 사람 뭐지? 그의 눈에 완전히 매료되어 나는 기싸움이고 뭐고 다 잊어버렸다.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순식간에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오기로 품은 질문을 간절히 바라게 됐고 정말로 궁금해했다. '질문이 참 많은 애' 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틈만 나면 물어봤다. 지금까지 실증 한 번 내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건 궁금한 게 많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풀지 못한 미제의 사건처럼 남아있는 그 질문은 연기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었고 또 다른 질문을 낳아서 나 자신도 사랑하게 해주었다. 질문이 나와 현실의 버팀목이 되었다.
'마음으로 들어봐'
삶에 정답이 없듯 연기에도 정답은 없다. 그래서 나는 답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현재의 내가 믿는걸 최선이라 여기기로 했다. 나는 진실된 연기를 삶처럼 흐르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물음이 생기면 일상 속에서도 답을 찾는 편이다.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인간이 나라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떻게 듣고 있지?’ ‘나는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지?’ ‘어? 나 평소에도 안 듣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과는 수시간을 이야기해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시간을 돌덩이처럼 만들어 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상대에게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이 되고 싶을까..’ 대화를 하면서 상대를 관찰하고 나를 들여다봤다. 그러다 우연히 마음을 들으려고 할 때 공감이 자연스럽게 일렁인다는 걸 발견했다. 어느덧 대화가 어렵지 않게 되었고 동시에 떠다니던 질문들도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끄럽던 방 한 칸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이렇게 삶에서 찾은 나의 언어를 연기에도 적용시켜 본다. 대사는 남의 말로 하기에 그 과정이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연기에서 관통되는 진실은, 진짜로 존재하는 순간이란 모든 관심이 상대방에게 가 있을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담긴 눈이 좋다. 히스레저의 눈이 그렇다. 그는 눈으로 말을 한다. 그리고 마음이 담긴 눈에는 언어가 필요하지 않음을 그가 연기로 증명해 줬다. 배우들의 세계적인 보이스코치인 크리스틴 링클레이터는 자신의 저서 <자유로운 음성을 위하여>에서 당신은 당신이 하는 말을 관객이 듣고 이해하기만을 바라는 게 아니라, 당신이 왜 그 말을 하는지를 관객이 듣고 이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나의 의미로서 ‘마음'이라 해석했다. 우리는 귀 보다 더 다양한 곳을 통해 들을 수 있고 입 보다 더 다양한 곳을 통해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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