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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안 들어?

배우를 꿈꾸게 되다.

by 안 희



지안 : (어리둥절하며) 네??? 저 들었는데요??

선생님 : 아닌데, 너 안 들었는데.

지안 : (황당해서) 아.. 저.. 들었는데..

선생님 : (단호하게) 아니. 넌 안 들었어.




내 인생의 최고로 어이없는 비난이었다. 귀가 버젓이 있는 나에게 듣지를 않는다니. 그 말이 마치 질투 같아서 나도 모르게 기가 찬 티를 내고 말았다, 썩소와 함께.


그녀는 나를 바라봤다. 아무 말 없이, 마치 다음의 말이 나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듯이, 그저 보고만 있었다. 연습실 중앙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나를 책임져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학생들은 내 눈치를 보며 딴짓을 했고 다음이 자신의 차례일지도 모를 두려움에 바닥만을 바라봤다. 이 상황은 점점 내 숨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렀고 정적이 지속됐다. 대낮에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수업이 끝이 났다. 그 상태로 수업이 끝이 났다.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와 개인 연습실에 들어가 참았던 눈물을 꺼내는 순간 그녀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나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을 다 토해내니 늠름한 각성이 찾아왔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 말의 뜻이 뭔지, 내가 이토록 짓밟히는 기분이 드는 건지. 나는 비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찾으리라.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내 안에도 끈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기 위해 낭떠러지 밑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린 나의 자존심을 구해주기 위해 들을 수 있는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만 하루하루를 살았다.


ㄴㅏ나ㅏㄱ그.


8개월이 흘렀다. 그녀의 코는 멀쩡했고 나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거다. “선생님,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 하나면 끝났을 여정을 굳이 자전거를 택하는 나. 어쩌면 그날, 그녀는 내게 이 질문을 얻길 바랐던 걸까?


그 당시 나는 매달 한 명의 배우를 정해 그 배우가 나온 영화들을 전부 보는 아주 아날로그 적이며 무식한 방법을 사용 중이었다. 영화 속에는 감정들이 다양했다. 말랑하고 차갑고 딱딱하고 애절하며 산란한 등의 감정들이 영화라는 세상 안에 전부 있는 것 같았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심장이 뛰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뛰는 내 심장소리가 귀에 들렸다. 첫 경험처럼 잊을 수 없는 이 날들의 기분. 자존심 회복이란 목적을 망각한 나는 어느새 영화를 좋아하는 학생이 되어가고 있었다.



봐도 봐도 줄지 않는 명작들과 명배우들은 마치 알라딘의 보물창고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히스레저. 그는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 배우였다. 그의 눈에서는 진짜 마음이 느껴졌다. 2001년도 영화 <기사 윌리엄> 속에서 그는 눈으로 심장을 보여줬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말을 했다. 그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변하고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소나기처럼 그도 그렇게 반응했다.

그 장면을 정지시킨 뒤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화면을 뚫고 나오는 그의 진심을 바라보며 미래의 나를 떠올렸다. 만약 내가 배우가 된다면 그와 같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갈망이 일렁였다. 처음으로 배우를 꿈꾸게 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날이었다.



8년이 흘렀다. 여전히 듣는 게 어렵다. 머릿속에는 경험과 가치관에서 만든 나만의 답들이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기에 상대의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되어 듣는다는 건 더 어렵다. 그럴 때마다 그를 떠올린다. 내게 들려준 그의 마음을 생각하며 내가 맡은 인물의 마음을 듣기 위해 마음을 기울인다.


귀로만 듣던 나는 수년이 흐르고 나서야 마음에도 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정말로 듣는다는 건 8개월의 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기술 같은 게 아니었다.


12년이 흐른 지금도 습관처럼 듣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순간 진짜로 듣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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