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의 생존기
호기심은 동물이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원정, 탐사, 교육 등의 선천적으로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는 행동들의 원인이 되는 감정이다. 호기심은 학습 과정과 지식 및 기술을 습득하려는 욕구에서 파생되는 인간 발달의 모든 측면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들의 호기심이 처음 폭발하는 시기는 유아기다. 세상은 온통 처음 보는 것들로 가득하다. 몰라서 궁금하고 그래서 신기하다. 알고 싶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말을 할 수 없고 걸을 수 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낮은 자세로 기어가 손으로 만져보고 입으로 맛을 본다. 우리가 세상을 최초로 감각하는 금쪽같은 순간이다. 손에 닿아지는 딱딱함과 말랑거림, 입으로 느껴지는 달콤함과 시큼함, 다양한 감각들을 통해 구별을 배우고 위험과 좋음의 상태와 감정들을 경험한다. 인간이 언어에 방해받지 않고 경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간이다.
호기심은 유아의 성장과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새로운 경험은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확장하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때, 엄마&아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자, 내가 아기라고 한번 상상을 해보자. 나는 아가다. 저 멀리 무언가가 눈으로 들어온다. 그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가는데 재미난 소리가 난다. 궁금하다. 호기심이 작동한다. 알고 싶다는 본능이 신호를 보낸다. 엉덩이가 씰룩이며 무릎이 간지럽다. 영차 영차, 온 힘을 다해 기어간다. 겨우겨우 도착한 거대한 물체 앞에 드디어 다 달았다. 이제 손만 뻗으면 되는데, 바로 그 순간 아빠가 나타난다.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물체를 치워버린다. 눈앞에 무언가가 사라졌다. 자, 어떤 기분이 드는가?
"응애!!!!!!!!!!!"
호기심이 첫 슬픔을 느끼는 순간이다. 하지만 괜찮다. 실망감을 경험했으니까.
나의 두 번째 호기심이 폭발한 시기는 생애 처음으로 바다를 건넜을 때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외국땅을 밟아봤다. 인생 첫 비행의 공포체험이 끝나고 눈앞에 펼쳐진 new world는 13년간 보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상에 있는 나 자신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게 했다. 공항문이 열리자마자 환영하는 엄청난 습기와 음악처럼 들리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내 안의 호기심이 다시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에 우아하게 질문을 초등학생답게 폭탄처럼 던졌다.
"저건 뭐야?' '저거는?' '이건 뭐야?'
"응~ 저건 버스 같은 거야.' '저건 그냥 닭꼬치 같은 거야. 먹어본 적 있지?"
'버스 같은 것'과 '그냥 닭꼬치'로 저것들과 내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끊어진다. 언어는 '퉁쳐지는 말들'로 경험을 박탈한다. 시시해진 호기심은 자라나지 못하고 시들어간다. 실망감이 학습된다.
다행히 연기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서 세 번째 호기심이 폭발했다. 성인이 된다고 호기심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방치되어 있을 뿐. 호기심은 세월을 모른다. (나의 공식적인 데뷔는 2014년 ocn드라마 <귀신 보는 처용>이다. 그때 나는 28살이었다.)
정말 모르는 게 가득한 이 세상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알고 싶었고 궁금했다. 호기심은 다시 질문의 동기를 만들어주었다. 사회를 배운 나이가 되었으니 이번에는 눈치껏 다가간다.
"실례합니다. (제 호기심이 물어보지 않으면 숨을 쉬질 않아서요..)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선배님은 어쩜 이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어요? 저는 뭘 하면 될까요?"
프로의 세계에서는 흔치 않은 일 이라며 직설적이고 솔직한 질문을 처음에는 귀엽고 열정 많은 신인배우로 봐주셨다. 호기심은 반응을 먹고 커져갔다. 인정받은 호기심은 즐거움을 피어내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내 질문에 지쳐갔다. 배려와 예의로 돌아오는 '거절' 들과 마주하는 날들이 많아졌고 상처받은 호기심은 더 깊은 잠에 들기 위해 등을 돌렸다.
나의 질문은 다소 심각하고 진지하다는 평이 많았다. 나는 그게 너무 이상했다. 좋아하면 알고 싶고 알지 못해 답답하고 답답하니 더 알고 싶어 지는 게 당연한 수순 아닌가? 솔직히 나는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 생각이 없었다. 미치도록 궁금한 것들이 어지간히 본질적이었을 뿐. 궁금한 게 풀리지 않으니 답답해졌고 절박함은 더 깊어져갔다.
“배우는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안 돼. 넌 너무 철학적이야.”
잘 따르던 선배에게 마지막 들은 말이다. '안 돼', 이 말은 얼음장처럼 굳게 생긴 알루미늄 문으로 나를 밀쳐내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일말의 가능도 동의하지 않겠다는 칼 날 같은 말, 이 날 이후로 나는 질문하기를 그만두었다.
삼십 대가 되자 어느 정도 알만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눈치였다. '질문이 많은 성인'은 파티의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불편한 분위기가 지속되자 자연스럽게 집순이가 되었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던 나 조차도 점점 피해자의 성격으로 바뀌어갔다. 나의 영혼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일기장에 마음을 주기 시작했다. 일기장은 질문들을 조용히 들어주었고 왜 이런 질문을 하냐는 말을 되묻지도 않았다. 겨울잠에 들기 직전의 내 호기심은 글 속에서 방해 없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가까스로 부지한 생명력은 더 깊고 빛나게 되었다.
나는 질문을 쓴다. 그리고 생각을 멈추지 않았던 덕분에 오늘을 살게 됐다. 만약 '안된다'는 말에 생각하기를 멈추었다면 나라는 뿌리가 지금의 잎을 피워낼 수 있었을까? 여전히 이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살 수 있었을까? 나에게 '감탄'이란 숨이 살아 있었을까?
생각이 많은 게 배우에게 치명적인 이유는 충동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충동이 올라올 때 행동(acting)을 해야 하는 배우에게 생각 (자의식)은 방해요소가 되는 것은 맞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생각이 많은 배우는 자의식을 해체하는 감각훈련을 남들보다 더 많이 하면 된다는 것이고 생각이 많은 배우는 분석력이 뛰어날 수 있으며 결국, 나만의 장점, 개성도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듣고 있는 '안돼' 안에 나만의 빛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받았던 훈련 중 라반, 뷰포인츠 등의 감각, 움직임 기반의 훈련에서는 언어가 '얹어지는 것‘으로 적용되거나 사용되지 않는다. 마치 유아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오로지 감각에만 의존한다. 언어와 기준에 익숙해진 성인에게 처음 이 작업은 통과하기 어렵고 자책에 빠지기 쉽지만 한 고비만 넘기면 탁, 감각이 주는 황홀한 선물을 받게 된다. 나에게 5살 이전의 방해받지 않았던 그 호기심이 내 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잠자고 있던 호기심은 기쁜 마음으로 깨어날 것이다. 나에게 배우훈련은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칠해진 과거의 거절들을 지나가게 해주는 통로가 되어주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마추어 (amateur)는 라틴어 '사랑하다' (amare)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나는 아마추어로 살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익숙하지 않은 것에 호기심을 가지면 그건 내 것이 된다."
- 프리드리히 니체
@ 커버이미지 : <배우일지> 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