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친절 대마왕 - 3
3.
차를 한강공원 주차장에 세워놓고 둔치공원으로 나가니 늦가을이라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나는 근처 매점에서 막걸리와 새우깡을 사서 한강이 바라보이는 계단에 앉아 막걸리를 한잔 마셨다. 원래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는 체질인 데다가 부실한 안주로 술을 마실려니 속이 아려왔다. 멘솔에세 담배 한 가치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폐 속으로 연기가 흠뻑 들어와서 나가는 느낌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막걸리를 한잔 더 마시고 한강변을 보니 모두 연인인 듯 팔짱을 끼고 산책하는 남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히 다정한 모습에 영미의 하얀 얼굴이 내 눈에 아른거린다. 사귀려면 동기가 아닌 선배를 사귀지. 하필이면 동기와 사귈게 뭐람. 자존심 상하게... 어쨌든 망우 세무서에서 차석 구역을 인수할 때부터 모든 일이 꼬인 듯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향으로 귀향하고 옥탑방에서 혼자 사는 처지라 집에 가야 위로해 줄 가족도 없고 오늘 같은 날은 옥탑방에서 맨 정신으로 잠들기가 더 힘들 것 같아 나는 계속 막걸리를 마셨다.
술에 취한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앞으로 걸어갔다. 한강물이 느껴졌으나 이대로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서 내가 물에 빠지려 한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모두 자기들의 흥에 겨워 내 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에 무서움이 몰려오는 순간 나는 만취상태로 정신을 잃고 누군가에게 발을 잡히어 끝없이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정신이 든 곳은 엘란트라 차 안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젊은 사람이 왜 자살을 하려고 해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죠?”
“아까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잖아요. 내가 산책하다가 보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죽을 뻔했다니까요. 물에서 건져내고 바지를 보니 자동차 키가 빠져나와 있어서 이 차가 여기에 주차된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일단 여기로 데리고 온 거예요.”
“아무튼 감사드려요. 이제 됐으니까 가보셔도 돼요.”
“안 되겠어요. 제가 차를 몰아 집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술이 아직 덜 깨서 운전하시면 안 될 거 같아요. 또 어떤 짓을 할지 걱정되기도 하고...”
“그래 주시면 감사하긴 하지만 제 집은 망우동에 있는 데 괜찮으시겠어요.”
술이 깨면서 그녀를 보니 긴 생머리에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져 첫눈에 봐도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나는 뜻밖의 도움에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이런 미인이 나를 도와 생명을 지켜준 것에 묘한 흥분이 생기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안내하는 대로 운전을 하여 망우동에 있는 나의 옥탑방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방에 들어가서 불을 켜니 정리되지 않은 나의 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는 이런 나의 방을 여기저기 쳐다보다가 세법 책과 국세청에서 발간한 책자들을 보더니 “국세청에 근무하시나 봐요. 이렇게 좋은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 왜 그런 짓을...”하며 자기의 명함을 나에게 주었다. 명함에는 “마음상담소장 황수정. 당신의 힐링을 도와드립니다.”하는 짧은 문구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면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한때 죽을 마음을 먹은 적이 있어서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그러니 꼭 한번 저의 사무실에 오세요.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긴 생머리를 뒤로 젖히고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간 뒤 옥탑방에서 나와 옥상에서 골목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돌아서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생긋 웃어주었다. 마치 여교사가 남자 학생을 바라보듯이 애정이 담긴 눈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