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잔인한 봄, 그리운 봄

1. 사랑에도 리허설이 있나요?

by 무 한소

어느 해 9월 가을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쯤 그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남편과의 만남이 운명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그때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그들의 만남에서는 반드시 만나야 할 단 1할의 공통분모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긍정과 부정의 시간을 함께 보낸 다음, 어느 해 12월 그들은 서로 각자의 눈높이와 욕심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그때의 느낌은 설레었던가? 겹겹으로 쌓인 여러 감정이 온통 수애를 지배했다. 아주 작은 지분의 담담함과 그것보다는 큰 지분의 두려움, 그리고 상반된 자신감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신혼여행을 시작이자 끝으로 그와 그녀의 꿈의 여행은 안전하게 마무리되었다. 냉정하리만치 깔끔하고 정확하게 매듭지었다. 마치 물건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수애가 영수증을 손에 쥐고는 직접 확인하고 확실하게 마무리하듯 그들의 꿈의 여행을 끝으로 더 이상의 달콤한 시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결혼식으로부터 단 일주일의 달콤한 시간 이후 두 사람은 바로 앞에 놓인 현실과 직면하게 다. "걱정 마, 결혼 함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할 수 있게 해 줄게." 믿지 않았다. 단지, 그 마음이 좋았을 뿐이다. 지켜내리라는 다짐과 각오.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적인 마음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을 지금 돌이켜 보면 뭔가 묘한 감정이 내면에 숨겨져 있었다.



그때 시작이었던 결혼생활은 온통 책임만이 있었고 책임보다 가벼운 선택으로 의무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간직해 온 자신의 것은 사라져 버리고 허무함만이 고스란히 남았다. 온통 의무로 가득 채우고 있던 결혼 생활의 출발은 '시작'이라는 단어와는 모순되게 무거웠으며 안개에 둘러싸인 듯 답답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책임의 무게까지... 지금은 내적으로 성장한 덕분인지 대부분은 일상으로 이해되고 그 영향으로 단단하게 견디는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조금씩 보편적인 삶의 무게쯤은 굳건히 견디게 되었다. 결혼을 선택한 이후 결혼생활에서의 의무는 천천히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와 비례해서 동시에 '나'라는 존재는 점점 사라졌다.


12월의 결혼 이후 우리는 '첫 봄'을 함께 맞이했고 봄이라는 자연의 선물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혼과 동시에 그와 그녀 누구의 선택도 아닌 경제적 위기를 맞은 그들의 첫 봄, 수애가 다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르침, 그리고 다른 새로운 도전... 결혼식 이후의 첫 크리스마스와 첫 봄은 혼자서 맞이했던 수많은 여러 해의 날들과는 이미 '우리'라는 것에서 달라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특별한 첫 크리스마스와 봄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은 그녀를 설레게도 했지만 두려움으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스스로 감정 속에 점점 두껍게 자리 잡았으며 답답함과 견뎌낸다는 묵직함의 무게는 계속해서 자신을 눌러댔다.



4월은 잔인했다. 도전했으며 결혼 생활에 있어서 의무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4월은 잔인하게 수애를 무너뜨렸다. 겨울을 밀어내듯 도망쳐 왔지만, 찬 바람이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있다. 봄을 제치고 앞서가서 선두를 지키며 하늘거리는 봄옷을 입고 봄을 맘껏 노래하려는 자신을 혼내기라도 하듯 변덕스러운 날씨가 주변 공기를 에워싼다.


봄기운이 시작되는 4월에는 새싹도 꽃망울도 흙으로 덮인 땅속에서 겨우내 자신을 감추고 닫고 지내다가 점프하듯 올라왔다. 안간힘을 쓰면서 땅을 뚫고 싹을 틔웠다. 자연의 젖줄인 봄의 비와 햇살과 생명력은 그녀를 자연에서 떨어뜨려 선을 긋고 그것도 모자라서 장벽을 쌓았다. 치열한 현실을 견뎌내라고 현재를 바로 보라고 호통쳤다. 깊어진 봄, 봄 비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으나 수애에게는 강한 호통처럼 따갑고 아프기만 했다.


겨울을 밀어버리듯 찾아온 가는 봄비, 시작되기도 전에 시간을 앞당겨 인력으로 끌어당긴 오는 봄비 그리고 어렵게 만난 봄을 맘껏 즐기고자 그 시간을 함께했던 봄 가운데의 비, 다시 밀어내듯 습도 높은 여름을 어렴풋이 끌어당기는 가는 봄비이자 시작되는 여름 비... 봄비가 이렇게 다채로웠던가? 마무리 정리와 새로운 맞이를 확실하게 준비하는 봄비의 모습과 노력이 환히 보인다. 계절 속에서도 융화와 의무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봄비가 자랑스럽다. 결혼 이후의 첫 봄은 그렇게 묵묵한 듯 소란함으로 다가왔다.



3월, 4월... 그렇게 시작된, 설레는 봄은 잔인했다. 그 아이도 봄의 설렘으로 더 신이 났으며 즐거웠으리라. 행복한 감정이 충만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설레고 생기 가득한 봄이 얼마만큼 잔인한지, 자연과 수애를 분리했는지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아이는 봄을 닮아 다채로운 색을 지니고 있었다. 얼굴빛은 햇볕을 만나기 힘들었을까 염려할 만큼 창백했다. 낯 빛과 미소가 맑았으며 착한 심성의 아이는 봄과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봄볕 같았다. 잔인한 그해 봄이 아이를 집어삼키기 전에는 그녀에게도 봄은 설렘과 시작의 아이콘이었다. 아이를 삼켜버린 이후 긴 시간 동안 봄은 적반하장으로 수애에게 그 어떤 변명도 이해도 바라지 않았다. 단지 스스로 이겨내고 견뎌 내라고만 했다. 더 깊은 인내심을 요구하며... 잔인하고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뻔뻔스럽다고 생각했고 증오와 원망에 몸부림치는 감정은 차디찬 이성을 결국 이기지 못했고 스스로 정리했다. 주변을 향한 시선의 문,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마음의 문, 정상적으로 건재한 육신의 문...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모든 문을 닫았다.


잔인한 봄 덕분에 결혼생활에서의 의무를 다하며 얻은 것이 있다. 강인함, 그 무엇보다 더 강인함이 부드러움을 앞섰고 감정의 무력감이나 감정 기복이 크게 없어졌다. '과연 이런 것도 봄이 수애에게 준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봄은 그녀를 정말 사랑하는 걸까? 사랑이 가득한 봄의 배려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인했다. 계절과 함께 변화하는 좀 더 성장한 감정은 좀 덜 성숙한 수애를 안고 싶었던 걸까?'



잔인한 봄이 다시 설렘으로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봄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로 설레며 봄 향 가득한 거리를 걷던 어느 해의 잊힌 봄. 잠시 스쳐 지나며 다가온 아련한 그리움이 있다. 수애에게 그리움은 힘이었다. 오늘 다시 그리움에 힘을 얻어 잔인한 봄이 아닌 잠시 스쳐 지난 설레는 봄을 노래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