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사랑은 진짜였을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다채로운 상실감의 경험과 그 햇수가 늘어난다는 것일까? 나이라는 것은 그녀에게 먼저 물리적으로 다가온다. 필터 없이 직접적으로. 때로는 그 체감의 시간이 수애를 더 강력하고 깊게 누르기도 한다. 오늘도 삶의 깊이에서 허덕이며 여전히 '왜'라는 물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내면은 그런 질문과 동시에 그곳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체감의 나이 속에서 변화와 질서에 그녀는 얼마만큼 수긍하고 있는 걸까? 빠르고 리듬 있는 변화를 적응하지 못하는 물리적 시간이 선택한 수긍은 수용이라는 배려를 낳았다.
결혼 이후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건 항상 단계를 더 쌓아가고 여림이 누적된 시간 가운데 특별한 정점이 있기 마련이다. 새로운 관계에서 시작되는 낯섦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까지.
여기 단단해 보이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 삶이 무기력해진 수애의 엄마가 있다. 배우자의 죽음을 통해서 상실감과 만난 이후 그녀가 그 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을 보낸 지 4월이면 벌써 3년째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3년 전 4월 어느 날 아빠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제는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빠를 궁금해하거나 그리워하지 않는다. 수애가 아빠를 기억하는 건 단지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을 더듬는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추억 가운데의 기억은 평범함 속의 소소한 행복으로 남아 있을까? 특별함 속의 아픔이 지금의 삶에서도 회자되는 걸까? 우리는 누구나 기억에서 조차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릴까 두려워한다. 과거 여러 일들에 대해 특별한 기억으로 남고 기억되고 싶었다. 이왕이면 역사적으로 좀 더 위대하고 더 멋진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식인 수애의 시선에서는 아주 잘 견뎠던 엄마. 엄마는... 강했다. 일관된 강한 모습과 눈빛으로는 최소한의 흔들림만을 보여 주었다. 수애의 결혼을 기점으로 전과 후, 두 분의 삶의 태도는 전혀 다르게 비쳤으며 점차 변해갔다. 아빠는 가족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자주 찾고 가족 가운데 머무르려고 했으며 엄마는 그전부터 조금씩 독립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빠가 망각해 버린 앞선 시간은 결국 아빠가 찾으려고 했던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아빠는 이미 조금씩 단절되고 있었다. 시작과는 상반된 맺음에서, 관계에서 그리고 존재에서 잊히고 단절되고 있었다.
엄마의 시점에서도 결혼을 선택하며 다양한 무게의 관계가 시작되었을 거다. 사회적인 관계가 엄마의 생활을 더 다채롭게 만든 만큼 거기에는 무게감도 크게 실려 있었다. 무게가 묵직하게 눌러댈 때면 삶의 고통은 즐거움을 돌아서 마치 그것이 가치인 거처럼 다시 찾아온다. 욕심이 없다고 강하게 부르짖고 가치를 가장 가볍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나의 선택적 결혼이 엄마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아니 그 결혼을 시작으로 엄마의 삶은 수애의 새로운 시작 못지않게 고단해졌다. 그것은 엄마의 인내를 다양하게 확인해 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엄마의 인내는 매 순간 최댓값을 맞이했고 그곳에 머물렀으며 갈등의 끝에 집중해 있었다. 오늘의 최대치보다 내일의 최대치가 크지는 않을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가장 크고 강약으로 미루어 볼 때도 그것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리고 아빠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날 비로소 엄마는 스스로 인내의 극한값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 엄마가 심하게 앓고 있는 상실감의 극댓값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도한다. 극댓값이라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시작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별을 돌아봐야 했다. 이별의 순수한 의미를, 만남과 헤어짐의 인과관계를... 시작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하며 맺음을 준비하는 정성스러움까지가 결혼의 선택 이후 이행되어야 할 의무라 할 수 있다. 탄생과 더불어 우리는 무의식에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결혼의 선택으로부터 우리에게는 책임이라는 의무가 주어졌다. 탯줄이 잘린 순간 아기는 무의식에서도 그 찰나가 죽음으로 가는 항해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결혼을 선택한 바로 그 순간 결혼 생활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알아차린 것처럼.
시작은 맺음보다 앞서 있다. 만남은 벌써 이별을 앞서 간다. 100m 달리기에서는 출발선에서부터 시작과 맺음, 만남과 이별의 해석에서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삶은 마라톤과 같다. 수애가 결혼을 선택한 순간 그때부터 펼쳐진 시간은 단거리가 아닌 오래 달리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마라톤 경기에서는 시작이 맺음을 급히 앞서가는 의미가 있을까? 앞섰던 시작이 멈추거나 턴을 하며 가쁜 호흡을 할 때 맺음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지나간다. 결국 맺음이 시작을 쫓아 앞선 것이다. 저만큼 앞에서 봄을 닮아 살랑살랑 춤을 추던 만남이 발끝에 힘을 지나치게 주어 근육이 뭉쳐버렸다. 잠시 멈춰서 뭉쳐진 아픈 근육을 풀고 있을 때... 버티던 겨울을 봄바람이 가볍게 타고 보낸 것처럼 이별은 빠른 속도로 성큼 다가섰고 다시 만남을 지나쳐 갔다. 그것 또한 앞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