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멘탈은 읽기와 쓰기, 27년 지기 베프와의 수다로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였다. 와장창 무너진 루틴은 다시 몸을 움직이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는 건 경험상 알고 있다. 모처럼 혼등을 나섰다.
"혹시 이거 떨어뜨렸어요?"
등산로 초입에서 어르신 한 분이 어깨를 툭 친다. 아, 방금 이어폰을 찾느라 열었던 가방에서 떨어졌다 보다. 불량 시민이 주으셨으면 부릉부릉 새 차를 잃어버릴 뻔했다.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먼저 가요."
앞쪽에 오르시던 어르신이 멈춰 서서 길을 내어 주신다. 어르신의 속도와 나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내어 주시는 길에 꾸벅 인사를 하고 속도를 내어 본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길을 막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도착한 정상석에서 어르신 한 분이 핸드폰을 들고 뭔가 망설이시는 눈치길래 먼저 말씀을 건네었다. '웃으세요. 엄지 척해보세요.' 이렇게 저렇게 몇 장 찍어드렸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찍어드릴게요' 했더니 활짝 웃으시며 좋다고 하셨다. 마스크 속으로 나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지난 태풍 후 스러져 있던 나무가 안 보인다. 어지럽혀진 개울도 바로 잡혀 있다. 우수수 널브러져 있던 나뭇잎들도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앞 계절의 끝, 누군가의 손길로 편안하고 안전하게 오를 수 있음에 감사한다.
"계절 변화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3%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 그 3% 분들이 다 계신 것 아닐까요?"
다정한 음성의 라디오 DJ 멘트에 나도 모르게 콧구멍을 벌름거린다. 벌름벌름 벌름벌름.
난다. 가을 냄새가 난다.
밟히는 나뭇잎들의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이름 모를 풀꽃 냄새가 난다. 벗어 들었던 겉옷을 다시 입고 앞섶을 여미게 되는 바람 냄새가 난다.
평일 오전 혼자 산을 오르고 내릴 때는 주로 어르신들을 마주치곤 한다. 그런데, 오늘 내려오는 길에는 조금 달랐다. 레깅스를 맞춰 입은 젊은 학생들, 군복을 입고 커다란 군용 배낭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는 군인들, 알록달록 등산 점퍼를 입은 단체 등산객들도 종종 마주쳤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는 말이 있단다.
모두들 두 번째 봄을 즐기러 산에 오르고 있었다.
"다음에 산에 갈 때 같이 가요."
"오늘도 혼자 갔어? 엄마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는 사람은 없대. 공룡능선 가자."
혼등을 할 때면 세수도 않고 뱅글이 안경을 쓴다. 가슴팍에서 올라오는 땀냄새는 나조차도 역하다. 별다른 준비물 없이 물 한 병 들고 후다닥 나서는 게 편해서, 같이 산에 가자는 몇몇 이들에게 그러마 하고 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었다. 내 속도에 맞춘 내 마음만 챙기느라, 내밀어 주는 손들의 감사함을 내가 모른 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가을산에 오르고 싶다. 잠시 멈춰 경치도 보고 서로 사진도 찍어 주고 싶다. 하산 길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에서 잎채소 한가득 비빔밥 한 그릇을 비벼먹고싶다. '여기, 감자전에 막걸리 한잔도 주세요.' 먹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친정엄마 집 냉장고를 열어 아무 반찬통이나 열어 같이 밥을 먹고 싶다. 바다 보이는 횟집에서 가을 전어 한 접시에 시원한 청하 한 병이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언젠가, 아니 곧 만나요, 우리.
가을 냄새가 난다. 이제는 콧구멍이 저 혼자 알아서 벌름댄다. 다음에 산을 오를 때는 어쩌면 혼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 혼자 오르는 혼등 말고, 함께 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