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니체 이야기 _<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_3
프롤로그
큰아이가 초등학교 논술선생님께 니체를 아냐고, 엄마가 <짜라투르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다고 했단다. 논술 선생님이 "너네 엄마 대단하다." 하셨단다. 아직 다 읽은 것도, 다 소화한 것도 아니지만, 칭찬을 들으니 어깨 뽕 들어간 듯 기분이 좋았다.
제 1부_짜라투스트라의 서설_3
이제 짜투의 본격적인 지혜의 여정이 시작되었어. 숲에서 성자 노인과는 의미도 없고, 소통도 되지 않는 대화를 했지? 짜투가 오늘부터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는 어떨지 상상해 보면서 서설 3을 살펴보자.
짜투가 숲에서 나와 근처 거리에 들어섰을 때,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 왜냐하면 외줄 타기 광대가 재주 부리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거든. 짜투는 생각했을 거야. ‘음, 마침 사람들이 모여있군. 지혜를 나누어 주기 딱 좋아.’ 그리고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지.
“나는 그대들에게 위버멘쉬에 대해 가르치겠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 그대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신을 뛰어넘어 뭔가를 만들고 움직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런 극복을 향한 위대한 밀물의 흐름을 거스르고 역행하여 썰물처럼 살길 원하고, 인간을 뛰어넘어 극복하기보다는 오히려 동물과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느냐? 원숭이는 인간이 보기에 어떤 동물이냐? 무리를 지어 다니며 웃음거리를 만들고, 기껏 해봐야 인간을 흉내 내는 따라쟁이다. 위버멘쉬에게 극복하지 않는 인간은 바로 그 원숭이처럼 웃음거리요 보기 흉한 따라쟁이처럼 보인다. 인간은 그 옛날 벌레에서 인간으로,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진화했다고 말한다. 벌레나 원숭이 같은 생물에서 인간으로 단계와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하지만, 그대들 속에는 아직도 벌레로 가득 차 있고,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 같은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시간에 지하가 물었었지? 위버멘쉬가 뭐냐고. 짜투의 말을 보면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존재야. 사람들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극복하고 뛰어넘어 위버멘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성장이나 발전 없이 살아가기도 해. 그러니까 사람은 벌레나 짐승으로도 살 수 있고, 위버멘쉬로도 살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어. 짜투는 그런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위버멘쉬를 추구하면서 늘 자신을 극복하는 길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일까?
짜투는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한다”라고 선언해. 대지, 즉 넓고 큰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서서 살아가고 있는 곳이야. 땅 위에서 사람은 집을 짓고, 먹기도 하고, 잠을 자면서 살지. 대지는 우리가 실제로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세상, 현실, 그리고 생명이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살아 숨쉬기도 하고 다시 죽거나 없어지기도 하는 자연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어. 그리고 우리 인간은 그 대지 위에서 살고 있으니까, 대지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지.
위버멘쉬는 대지를 의미하고, 우리는 이 대지에 발 딛고 살아가니까, “언제까지나 대지에 충실하라”라고, 이 땅의 삶과 인생을 살라고 짜투는 사람들에게 다시 선언해. 그리고 대지에 충실하지 못하게 막는 “대지를 초월한 여러 희망에 대해 말하는 자들” 믿지 말라고도 해. 왜냐하면 그들은 알게 모르게 독을 타서 대지를 죽이고, 생명과 삶을 경멸하는 자들이니까. 그들은 결국 대지에서 질색하고 죽어가고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대지를 초월한 여러 희망’은 무엇일까? 초월한다는 것은 뛰어넘는,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잖아. ‘대지를 초월한 여러 희망’은 대지를 넘어서는 다른 곳, 대지보다 우위에 있는 세계, 늘 변화하는 대지와는 달리 불변하고 이상적이고 본질적인 곳, 그곳에만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구원과 희망, 소위 ‘하늘나라 소망’을 말해.
그런 초월 세계의 구원과 희망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대지는 어떻게 보이겠어? 땅(대지)에서 사는 현실의 삶이 어떻게 생각될까? 현실의 삶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면서 경멸하고, 질색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 위에 있는 세상, 저 초월 세계만 의미 있고, 하늘나라 희망과 구원을 꿈꾸며 사는 삶이 최상이고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겠어?
그 옛날 고대, 중세시대는 초월 세계를 변하지 않게 하는 근원은 ‘불변하는 신’이라고 생각했고 신중심적인 삶을 살았어. 순간순간 변하고 나약하며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불변하는 신으로 위안 삼고, 그 신을 향한 초월세계로의 희망을 품었지. 그러면서 초월세계를 현실 세계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고, 현실 세계는 무시했어. 고대, 중세시대에는 이렇게 현실세계와 초월세계를 2개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말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았어. 그래서 우리가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몸(육체, 현실)은 저급하고 불결하고 죄로 가득하다고 생각했고, 영혼(초월세계)은 그런 몸보다 더 고상하고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
그 시대에는 신에 대한 모독과 욕은 최대의 모독과 욕, 한마디로 가장 큰 불경이었어. 그런데 짜투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해. 이제 ‘대지’를 모욕하는 것이 가장 큰 모독이야. 눈으로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초월 세계를 대지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가장 큰 모독이자 욕이라고 선언하는 것이지.
이어서 짜투는 육체가 굶주리고 말라비틀어지길 바라며 경멸했던 자들을 비판하며 굶주리고 말라비틀어진 것은 오히려 영혼이었다고 선언해. 중세 시대에는 육체를 경멸하고 영혼을 추켜세우는 것이 가치 있고, 육체를 깔봄으로써 영혼이 육체와 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영혼이야말로 더럽고, 가엽고, 비참한 자기만족이라고 일침을 가한 것이지. 왜냐하면 신은 죽었으니까.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대지와 저 너머 세상(하늘나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은 이제 힘도 없도 의미도 없으니까.
이제 짜투는 인간이 어떻게 극복을 시작해야 하는지 선언해.
“인간은 오염된 강물이다. 오염된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바다가 되어야 한다. 위버멘쉬는 초월적인 사상들을 향한 혐오와 부정과 거부도 가라앉게 할 수 있는 바다이다. 그러니 이제 그대들은 말하라. 그대들이 지금까지 믿고 추구했던 그대들의 행복,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미덕, 그대들의 정의 모두 혐오하고 거부하고 부정하고 파괴할 때이다. 그 혐오와 부정, 거부야말로 그대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대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는 행복, 이성, 미덕, 정의 모두 다 소용없고 의미 없다. 다 헛된 이야기일 뿐이다!’라 외쳐본 적이 있는가?”
그동안 사람들이 믿고 추구했던 여러 희망, 이성, 행복, 도덕, 정의, 동정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의 삶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오류로 가득하게 했어. 왜냐하면 행복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실제로 몸담고 살아가는 생존과 삶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 세상에 속한 이상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며 만족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사자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듯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지적 욕망은 결국 자기만족일 뿐이기 때문이지.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쉽게 정해버리는 도덕도 값싼 도덕이야.
인간은 그동안 이렇게 오염된 사상의 강물을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오염시키며 살아왔어. 하지만 위버멘쉬가 되려면, 그동안 믿어서 오염되었던 여러 사상과 미덕, 이상, 지식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파괴하고 경멸하는 것도 다 가라앉게 할 수 있는 바다가 되어야 하는 것이야.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파괴할 때, 바다처럼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고, 위버멘쉬가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야.
짜투는 또 이렇게 말해. 위버멘쉬는 저 너머 세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보는, 우리 삶에 실제로 나타나는 번개라고. 자신을 극복하기 위한 열정의 광기라고. 즉, 짜투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실제로 나아가서 이룰 수 있는 것이야.
이런 엄청난 짜투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외쳐.
“외줄 타기 광대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다. 어서 그 광대의 재주나 보여달라.”
사람들은 다들 짜투를 비웃기 시작했어. 줄타기 광대는 자기에게 한 말인 줄 알고 줄 타는 재주 부릴 준비를 하기 시작해. 사람들이 시장에 왜 모였지? 외줄 타기 광대가 재주를 부리는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야. 사람들의 관심은 외줄 타기 광대의 재주였어.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진지한 짜투의 위버멘쉬 선언이 귀에 들렸을까? 소 귀에 경 읽기였던 셈이지.
짜투는 성자노인과의 대화에 이어서 사람들과의 대화도 실패했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지혜이지만 관심이 없고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었어. 사람들의 비웃음에 짜투는 어떻게 반응할까? 계속되는 짜투의 여정은 어떻게 펼쳐질까?
에필로그
내 것으로 소화하기 위한 과정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문장과 단어 선택에 한계를 느끼곤 한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쓴 이 글이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귀한 보물이 되길 기대한다.
오늘 밤에 아이들을 재우기 전에 오늘 쓴 글을 낭독해 줄 예정이다. 큰아이는 엄청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기쁜 마음으로 낭독하련다.
<참고 문헌>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사순옥 옮김. 홍신문화사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지음. 세창출판사
「니체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정동호 지음.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