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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크코뿔소 Jan 10. 2023

절에 들어가고 싶을 때 쓴 글 1

           

지금은 2024년을 겨우 몇 달 남겨둔 시점. 부처님이 등장하신지 2500년이 넘었고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지는 무려 3만년이 넘었다. 퇴근 시간대 도시의 빌딩 사이를 매끈한 피부와 세련된 옷차림으로 바삐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현대 인류의 진화와 발전은 정점에 다다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아직도 괴로울까? 

  털이 수북한 원시인 못지않게 나는 식욕과 성욕 그리고 인정욕구에 쏠려 있다. 감이당의 불교 세미나에서 고미숙선생님은 감각에 매여 있는 만큼 생물학적 진화를 거꾸로 돌리게 된다며 질문하셨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우리 각자는 무엇에 쏠리는지 감각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했다. 인식의 구조는 타고 난 경향이 있다. 거기에다 후천적으로 환경과 사상- 지금 시대에는 자본주의- 영향을 더해 형성되었다. 책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묻고 자기 생각의 틀을 해체하고 다시 구성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인식의 틀이 있어야 욕구에만 쏠리지 않게 되며 부처님이 그 분야에 전문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라는 책으로 진행하는 세미나를 수강하며 괴로움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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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항상 신경이 쓰인다. 좀 붐비는 곳이라면 여지없이 혼자 온 나를 홀대하듯 안 좋은 자리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앉은 자리도 벌을 서듯 벽을 바라보고 혼자 앉아 먹도록 되어 있었는데 입구에 가까워 바람도 들고 오고가는 사람들이 모두 지나쳐야 하는 그런 자리였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며 화가 스물스물 올라왔다. 당장 박차고 일어나 나갈지, 먹고 나서 별점 테러를 해야 할지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워 진다.

  근데 어디 맛집 뿐이랴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혼자 가는 카페며 혼자 하는 쇼핑에서도 혹시 무시당하는  아닌지를 자동 감지한다. 앞으로  무너져  육체를 가진 사십대 싱글이라 하염없는 미래에 혼자인 순간이  많을텐데 이렇게 괴로울 일만 남은걸까. 절에 들어가고 은 순간이다.


무시의 기원

  무시당한다는 생각에 자주 휩싸이는  왜일까그건 누구보다 내가 어리숙하게 보일 것을 내가  알고 있어서이다일단 말투며 태도가 자신에 차 지 못해서 상대방 역시 동물적인 감각으로 나의 어리숙함을 감지하는  같다그래서  나이에도 귀엽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어 씁쓸해진다.

  이런 내가 싫지만기본적으로 남이 나를 나쁘게 대할까 두렵고 손해보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젖어있어서 어쩔  없이 자꾸 움츠러든 자세가 된다게다가 티비만 켜면 세상이  커플을 찬양하는 분위기이고 어딜가든 선남선녀가 넘쳐 나니쭈굴한 나 혼자이면 왠지  무시당할 것만 같다.


무시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무시의 반대쪽은 인정과 사랑이라 여겼다. 내게 인정과 사랑을 주는 대상은 주로 남자중에서 찾았다.

연인관계만큼 친밀하고 끈끈한 관계도 없고 어찌됐든 남자의 사랑만큼이나 실감나는 있을까? 한마디로 오감의 종합선물세트라   있다번듯한 직업을 가졌거나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 옆에 선다는 건 사회의 시선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남자가 나를 인정해주는 순간에야 투명인간에서 여자로,  존재로 사회라는 무대에  쉽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이었다.

  연애는 가끔 성공하고 자주 실패했다. 그런데 어렵사리 남자를 만나도 끝이 아니었다. 연인이란 이래야지 하는 머릿속 이미지에 맞지 않으면 트집잡고 시비를 따지다가 관계를 좋지 않게 만들어 결국 헤어지고는 다시 누군가  곁에 두기위해 헤매는 패턴을 반복하곤 했다하여간 어떻게 해야 인정과 사랑을 받을지에만 관심을 쏟다 보니 눈이 늘 바깥을 향해 있었다.


  경에서는 몸이 눈, 귀, 코, 혀, 피부, 뜻이라는 외부로 통하는 문을 통해 바깥 대상을 만나면 순식간에 좋다, 싫다를 판단한다고 한다. 좋은 느낌 중에서도 유독 집착하는 느낌의 대상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그것을 가지려고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실 내가 감각을 통해 접촉한 대상에 좋고 싫은 마음이 순간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생리적인 반응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렇게 느끼며 살아온 오랜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느낌에 집착을 놓지 못해 끊임없이 고통받는 단계로 갈지 말지는 내가 정할 수 있고 이때 무엇보다 실체를 바로 보는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철썩같이 인정과 사랑이라 믿은 대상의 실체는 어떠한가. 내가 사랑받았다 믿으며 의미부여 했던 것들도 실상은 별 게 아닌 것 아닐까. 상대방이 자기 감정과 이해타산에 따라 했던 행동을 나를 향한 인정과 사랑이라 믿어버렸을 수도 있다. 그저 기분 좋아 한 사탕발림에, 우울한 기분에 내게 던진 말 한마디에 며칠을 곱씹으며 천당과 지옥을 오갈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야말로 내가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며 주체로 살지 못하게  셈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무시도 인정도 없다

  남자의 사랑을 받는 느낌은 좋은거야 하는 단단한 생각의 덩어리가 있다. 그리고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면 나란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두렵다하는 덩어리도 있다. 흘려보내지 못해 계속 내 안에 있다. 무의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 덩어리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한다.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외부에 기회만 생기면 나로 하여금 정체된 감정을 터뜨리도록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게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생각의 덩어리는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가지 요소로 더이상 나눠지지 않을 정도로 잘게 인수분해 할 수 있다.

  물질(색)에 대한 느낌(수)을 느끼면 그것에 쾌, 불쾌(상)가 따르는데, 이때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고(행), 이 색수상행을 종합하여 나름대로 인식하는 과정(식)이 마지막이다. 이것들 중 한가지만 달라져도 수식의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한마디로 금방 깨져버릴 생각들인데 뭐라도 되는 듯 부여잡고 있는 셈이다.


  반대의 입장이 되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인정을 반대로 내가 주는 입장만 되어봐도(예를들어 '좋아요'를 누른다던지) 그걸 사랑을 준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이고 누군가 그것에 큰 의미부여를 하고 살아간다면 말리고 싶을 정도다. 내가 받는 입장에서는 그토록 절실했던 인정이란 것도 사실 주는 입장에 잠깐 서보면 그렇게 큰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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