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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은 아픈 사람만 가는 줄 알았다.

상담이 열어준 마음의 레드카펫(1)- 마음투자지원사업에 참여하다

by 다섯빛의 온기
‘○○씨는 자신에게 인색하시네요’


전 국민 마음투자지원사업에서 시작한 상담을 시작한 첫날,

상담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이 말 한마디는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내 마음속의 무거운 그림자를 정면으로 비춰주었다.


K-장녀로 30년 이상을 살아왔던 나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였다.

아빠의 경제적 무능은 곧 우리 집 전체의 무능으로 여겼다. 나는 아직 어렸고, 세상을 단순하게만 보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난 마음이었다.
어린 마음의 판단은 늘 잔인할 만큼 솔직했으니까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 무게는 늘 엄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내 마음 위에 내려앉았다


친척들 중 우리 집의 형편은 늘 끝자락이었다.
명절날 식탁 위의 웃음소리에도, 우리 가족은 자연스레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었다.
가족여행이 잡히면 우리는 언제나 “다음에 갈게”라는 말로 빠져나왔다.
그게 우리 집의 방식이었다 —

늘 번외였다.

그 번외의 자리에 오래 서 있다 보니

내 삶도 자연스레 번외 경기처럼 흘러갔다.


본 무대의 조명은 언제나 남을 비췄고, 나는 그 옆의 마운드 위에서 조용히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번외의 자리에 서 있던 시간은 사회로 나와서도 계속되었다.


직장에서는 늘 뒤처졌다.
묵묵히 맡은 일을 해냈지만, 승진은 남의 자리였다.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지고, 사회의 흐름은 알게 모르게 나를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은 하나둘 가정을 꾸리고, 삶의 단계들을 성실히 밟아나갔지만 나는 늘 그들의 사진 속 한편, 빈자리에 서 있었다. 그 순간순간의 공허함은 내 안의 고독을 더 짙게 물들였다.

세상은 달려가고 있었지만, 나는 제자리에 묶인 사람처럼 느리게 숨을 쉬고 있었다.


뒤처짐과 고립의 그림자는 집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집안의 가장은 엄마에서 나로 옮겨왔다.

“우리 집 기둥은 너야.”,
“우리 딸 없으면 어떡하니.”


그 말은 사랑의 언어였지만, 내겐 무거운 짐의 언어였다. 한옥을 마련하며 짊어진 대출의 무게는 월급이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마다 실감 났다.


월급.. 퍼가요~


이자와 카드값이 빠져나가면 남는 건 늘 빈 잔고뿐... 그 속에서 나는 ‘가족을 위해 더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를 위해 돈을 쓰는 일은 사치였고, 하루를 버티는 일은 의무가 되었다. 그렇게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관계에서도 나는 내 안의 빛을 서서히 잃어갔다.

모든 것을 당연히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무거운 ‘당연함’ 속에서 내 마음은 천천히 병들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카카오톡에서 정신건강센터 홍보글을 보았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우울 자가진단을 했고, 결과는 ‘중증 우울’.. 보건소 정신건강센터에서 전화가 왔고, 그렇게 첫 상담이 시작되었다.

공무원을 위한 ‘마음등대사업’을 통해 받은 3회의 상담은 무너진 내 마음의 방향을 조금씩 되돌리는 첫걸음이었다. 이후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전 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8회의 전문 상담을 바우처 형태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상담센터를 아무 기준 없이 선택했다. 하지만 금세 ‘나와 맞지 않는 상담’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두 번째 선택에서는 달랐다. 이번에는 정말 나에게 맞는, 마음의 언어가 통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1️⃣ 전화 응대와 안내가 친절한 곳

2️⃣ 심리검사와 시스템이 체계적인 곳

3️⃣ 무엇보다, 집과 가까운 곳


그렇게 신중히 선택한 두 번째 상담센터에서,

나는 결국 나의 마음을 열어줄 ‘소울메이트 같은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상담실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어떤 트라우마를 겪은 것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은데, 이런 상담까지 받아야 하나...'
'남들이 알면 정신력이 약하다고 비웃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내 민낯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이 발끝에 돌처럼 매달려, 한 걸음 내딛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선생님의 인자한 미소에 긴장이 풀렸고,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쏟아냈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그 한마디에 눈물이 터졌다.
형식적인 위로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은 내 안의 빗장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1회 차 상담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나눴다.


K-장녀의 무게, 대출금의 수치 등...


그 모든 구체적인 삶의 무게를 누군가 처음으로 물어봐 주었다.


2회 차에는 기질검사와 우울검사를 진행했다.
백여 문항의 검사 끝에 선생님은 조용히 말했다.

“○○ 씨는 우울증이세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제가 우울증이라고요?


저번 검사 때 정신과 선생님은 우울증이 아니라 성향이라고 그러셨는데..
전 그냥 내성적인 사람일 뿐인데요.”


그전까지 나는 그저 텐션이 낮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말했다.

“○○ 씨는 원래 우울한 사람이 아니에요.
너무 오래 희생하며 살아서,
마음이 고장 난 거예요..
이제는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살아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 안의 ‘나’를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야...”


그날 이후, 나는 달라지고 싶었고, 달라지기 위해 천천히 나를 일으켰다.


한옥이 '몸을 회복시켜 준 시발점'이었다면,

상담은 ‘마음을 치유하는 시작이었다.

뒤처진 삶이라도 다시 빛 안으로 들어가게 한 레드카펫의 첫 장면이었다.



✍️ 작가 코멘트
상담은 아픈 사람만 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안다.
마음을 돌보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는 걸. �
✍️ 작가의 말
이 글은 「뒤처진 자리에도 레드카펫은 깔린다」 연재의 일부입니다.
시스템 문제로 일부 글이 브런치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같은 시간의 기록 안에 있습니다.

✈️ [프롤로그]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18
✈️ [뒤처진 자리에서]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19
✈️[승진은 남의 자리, 야근은 내 자리]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22
✨[ 연재 관련 ]
당분간은 매일 한 편씩 씁니다.
늦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천천히 써 내려갑니다.
- 이후에는 기존처럼 주 2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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