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도록 살았던 고향이라는 공간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양철대문은 녹슬어 골동품이 될 수 없었고 찌그러지고 깨진 장독대는 발길질에 차여 파편으로 뒹굴고 있다. 세월을 알 수 있는 건 길가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들이다. 봄이면 벚꽃 향기에 취해 옛날의 풍경을 깡그리 잊고, 가을이면 단풍에 취해 옛일을 묻고 만다. 나이 들어가는 나는 이제 그곳에서 무얼 기억해야 할까. 그 많던 골목길의 그리움이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 사라져 버렸다.
학교를 오갔던 번잡한 골목길은 외국인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은 그대로 세월 속에 묻혀버리고 그곳에 대신 낯선 이들이 주인이 되어 또 낯선 이들을 고용해 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갔다. 변한 건 골목들이다. 그 골목길에서 보는 얼굴도 낯설고 이름도 낯설고 바라보는 시선은 더 따갑다. 내가 외국인이며 내가 오히려 이방인이다.
나이 들면서 갖고 살아야 하는 것. 누군가는 추억을 먹고 산다는데 오래된 추억들은 이방인의 것이 되고 새로운 것들은 내게 너무 낯설다.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워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현실이 외려 무섭기만 하다. 내가 기억하는 그 수많은 왁자지껄한 사투리 내뱉던 그리운 골목들의 풍경은 다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