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곁에 두고
골방에서 나는,
죽음을 떠올린다.
벅차오른 감정의 한 순간이 아니라
미사여구 필요 없는 말 그대로의 죽음.
시간이 되면 저물어 가는 저녁의 노을처럼
언젠가 당연하게 다가올 내 의식의 끝은
과연 어떤 형태로 있을까, 하고.
때때로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어떤 비보가 다양한 형태로 내게 닿는다.
안타까운 선택, 갑작스러운 사고,
또 악의가 지워버린 일상.
먼 곳의 일임에도
일순 스쳐가는 원통함과
동시에 인생의 무상함이
피부 위로 스며든다.
내게 닿은 비보같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 죽음은,
이미 내 근처에 존재할 수도 있으니.
너무 멀리 간 것 아니냐고?
저들도 내쉰 마지막 숨이
바로 ‘오늘’ 일 줄 알고 있었겠나.
멀어 보이나, 결코 멀리 있지 않은 것이 ‘죽음’이리라.
그래서 죽음은,
인지하는 것으로도
이리 숨을 삼키게 만드는데,
나는
이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있어야만 하는가?
화가 난다.
죽음이 이토록 사람을 나약하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어디까지 다다랐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
끝에 이르기까지 수반될 고통,
'null'로 표현될 수 있는 죽음 그 이후의 공백.
그쯤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
공포는 무한한 상상력에서 비롯되고,
두려움은 미지에서 시작되니까.
그래서 더욱 화가 난다.
고등학교 시절,
기껏 떠난 첫 서울행에서
고작 낯설다는 이유로
새벽녘까지 떠돌다
겨우 몸을 뉘인 숙소에서도
쉬이 잠들지 못했던
멍청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내가 생각나서.
어떻게 해야 이 나약함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을까.
6월, 호국영령의 달.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 걸어간 그분들을
어둔 천장에 새겨보았다.
그분들의 마지막을 따라가다 보면
배신이라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잠시간의 외면이나
하다 못해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로
생을 부여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분들의 마지막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나는 어떠한가.
백여 년 전,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면,
아마 나도 독립운동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을 외치다 잡혀
못 상자 속에 며칠을 굴렀다면 나는
끝내 입을 열었을지도 모르겠다.
강압이 아니꼽다는 이유로 선택한
어찌 보면 가벼운 마음가짐이던 삶은
고통보다 단단하지 못해 무너졌을 테고,
흥미본위의 지금의 내 삶도
결국 머리를 쥐어짜이는 고통 앞에
금세 놓아버리고 있지 않나.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살아있는 나를 더욱 부끄럽게 만든다.
그 시대와 지금은 분명 간극이 존재하지만
삶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중심에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을 테지.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은
아직도 미약하기만 하다.
그러니 나는
마지막이 초라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골방에 들어간다.
살아가기 위해 나는 죽음을 떠올린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죽음을 떠올린다.
그리하면 내 선택에
조금이나마 염치가 생길지도 모르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런치북]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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