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적으로 나는 새로운 것들을 좋아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건 쉽게 질려버리는 편이었다. 남들은 쿠팡에서 라면이나 음료들을 한꺼번에 사서 쟁여놓는 일이 꽤 있지만, 나는 지겨워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 음식도 입이 짧아 많이 먹지 못했고 조금이라도 반복되는 일상은 나에게 고역이었다.
그런 나에게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라는 매일의 의무는 나에게 최악의 족쇄였고 나는 매년 폭발직전의 상태로 학교를 다니는 어두컴컴한 얼굴의 학생이었다.
생각해 보면 서울에서의 독립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의 잔소리 안 듣고 자유롭게 살고 싶고, 눈치 안 보고 유흥과 예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서 독립을 원했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속에 아직 영화가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어서, 퇴근하고 시나리오를 쓰거나 연출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난 그저 25년간 살던 부산을 좀 떠나보고 싶었던 것 같다. 찐따들이 대학생만 되면 연애의 장이 열릴 거라고 환상을 가지듯이, 서울에 가면 나는 완전히 다른 어떠한 유토피아의 삶을 살 줄 알았던 거다.
현실은 똑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대로니까. 이태원 월세방의 창문에 서서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노라면 영감이 팍 터져서 예술가의 삶을 살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냥 가로막힌 앞 오피스텔 벽만 보일 뿐이었다.
세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해야 세상이 달라진다.
세상은 그저 고요히 아름답다. 똑같이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간다. 그 어떠한 현상에 내가 어떤 상념을 바람에 실어 넣을 뿐, 세상은 그저 흘러간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회사가 서울로 이전하면서 나는 급하게 집을 구해야 했다. 처음에 부동산을 돌아다닐 때는,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1억이라고요?"
내가 대출로 긁어모을 수 있는 돈은 수중에 1억. 무려 1억이었지만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방은 고작 4~5평대의 숨 막히는 집들뿐이었다. 문득 부산의 깨끗하고 널찍한 나의 본가가 떠올랐다. 아파트를 놔두고 이런 집에서 살아야 하다니. 독립이란 이런 것이구나.
출근 날짜가 다가오고 시간이 점점 촉박해진 나는 결국 서둘러 5평짜리 집을 계약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왜 그런 집을 계약했었나 싶지만, 처음 상경한 나에게 '집 구하기'란 너무 무겁고 돌덩이 같은 과제였다.
두 번째 과제는 완전히 바뀌어버린 회사에 적응하기였다.
"이런 골목에 회사가 있는 게 맞는 건가.."
처음 보는 복잡한 노선도에 구불구불한 출근길. 한 번씩 서울여행할 때 놀러 갔던 가로수길 근처에 회사가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1년 전에 여기서 놀 때는 내가 이 근처에서 회사를 다닐 줄 알았을까. 인생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나.
그 무수한 규칙과 알 수 없는 세계관속에 나는 휩쓸릴 뿐, 내일당장 변수가 생겨 나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기에 더욱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가 걱정돼 현재를 주저하지 말고.
미처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의 복잡한 컴퓨터선들을 정리하며 책상의 먼지들을 닦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거의 모르는 얼굴들.
회사가 이전하면서 대부분 동료들이 퇴사한 탓에 공기에는 익숙지 않은 파동들이 흐른다. 내 선임도 퇴사했으니 업무도 2배로 내가 모두 감당하게 되겠지.
그래도 그때의 나는 조금 걱정은 되지만 두렵진 않았다. 변화에 대한 고통보다 드디어 서울에서 독립을 이루어냈다는 자유의 쾌락이 더 컸기 때문에.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안락한 새둥지에서 드디어 저 너머의 드넓은 폭포로 날아간 기분이었달까.
사실 변한 것은 단순히 장소만이 아니었다. 20여 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저 한편으로 사라지고, 주로 만나는 사람이 바뀌었다.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헤어지자고 통보한 남자친구 또한 마찬가지로. 그때는 정말 한탄스러웠다. 상대방의 조건이 바뀌면 서로 나누었던 정신적인 것들을 바로 말소시켜 버리는 그런 남자를 선택한 나에 대한 한탄.
그 뒤로 나는 꽤 방탕하고 자유롭게 홀로 사는 생활을 즐겼다. 밤에 좋아하는 안주들을 시켜서 혼술을 해보기도 하고, 주말 낮에는 옥상에 올라가 따사로운 햇살을 직격타로 맞으며 여유를 부리기도 하고, 5평 좁은 원룸에 사람들을 모아서 시끄럽게 홈파티도 해보기도 하며.
지금 다시 3년 전으로 돌아가서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또 홀로 사는 삶을 선택할 것이다. 처음에는 상상보다 현실이 달라서 실망했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시간 동안 아주 많이 변했다.
'내가 그대로라서 똑같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홀로 살며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계속해서 쌓이면서 결국 나는 변하였고, 나의 세상을 완전히 바꿀 수 있었다.
당연히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개미가 될 수 없다. 혼자 소주를 들이키며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처절하게 고민도 해보고, 밤새 잠 오지 않는 밤에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알아도 보고, 새로운 친구들과 좁은 원룸에서 그들의 삶을 경청하면서 성장하는 오롯한 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