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매이는 길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
평생을 고대하던 프랑스의 몽생미셸을 보기 위해 기차역으로 향하던 새벽이였다. 당시 어느날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엄살 수준의 하찮은) 번아웃을 이겨내야겠다며 경상남도 출장지 모텔에서 급발진으로 해외여행을 계획했었다. 고작 10일을 앞둔 비행기를 끊고서 준비한 덕분이였는지 자잘한 시행착오로 예정된 고생이 한가득이였다. 특히 가장 큰 패착은 몽생미셸 일정을 프랑스 일정 둘쨋날로 계획했던 일이었다. 첫 날을 파리에서 보낸다면 그 숙소에서 커다란 짐들은 맡아줄 거라는 오판. 애초에 첫날 다녀오는 거였다면 깔끔했을 것을. 나는 파리에 도착한 첫 날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딱 6시간만 머물고는 다시 온 짐을 다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새벽 렌행 기차를 탔다.
안 그래도 아침잠이 유독 많은 나는 '못 일어나면 말고' 쯤의 엄청난 생각을 하고서는 대책없이 취침자세를 취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졸다가 어째서인지 조용한 느낌에 화들짝 깬 나는, 마치 지하철에서처럼 역명을 찾으려고 창문 너머를 이리저리 보면서 우왕좌왕하다가 그 역에서 내리지 못했다. 차라리 아예 지나쳤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 기차가 출발할 때 저 멀리에서 '렌'이라고 적힌 조그만 표지판을 발견해버렸다. 시간적으로 꽤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걸 져버린 사실에 너무 열받았지만 다음역에서 돌아오면 되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냥 여유있게 다음 역을 기다렸었다.
바로 다음 역이였던 생말로까지의 거리는 생각보다 상당히 멀었다. 조바심이 나서인지 생각보다 꽤 오래 달린 것 같았다. 심지어 도착해보니 돌아갈 렌행 기차는 5시간쯤 뒤라는 참담한 현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역 앞은 휑한 게 마치 우리나라 지방 어딘가의 간이역 같았다. 그래도 역 앞에 제법 커다란 건물도 있는데도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햇빛은 살갗을 뚫을 듯이 내려오고 있고, 넓은 광장에는 아무도 없다. 잠시 쉬어갈만한 까페 같은 곳도 보이질 않는다. 나는 꼼짝없이 역사 안 귀퉁이에 멀뚱멀뚱 앉은 채 쌩으로 5시간을 날려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에그가 잘 안되서 핸드폰도 먹통인 상황.
그러다가 누구에게 물었는지 기억은 잘 안나지만 조금 걷거나 버스를 타면 조금 볼만한 거리가 나온다는 역무원의 말에 그냥 호기롭게 가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그냥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바다를 보러 가보겠다고 생각한거 같기도 하다. 어쨋간에 도착하기 전까지 생말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전혀 몰랐었으니까. 아무튼 꽤나 지겹게 기다렸는데도 30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조금 고민하다가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내키는 만큼만 가보고 별게 없으면 다시 돌아 오면 될 것이다.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마을 같은 것이 나왔다. 그런데 여행지가 아니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게 작다. 낮은 건물들이 즐비한게 옛 영화에나 나오는 미서부의 시골마을 같았다. 도미노피자나 컴퓨터판매점 같은 곳도 있기는 했지만 원하던 곳은 아니였다. 거기에다가 그 곳 역시도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 공포영화스럽기까지 했다. 뭐라도 있을까 조금 더 가다가 되돌아 다시 원래 가는 길로 돌아와 향하던 방향으로 걸었다. 사람은 여전히 없고 저 멀리까지 나무들만 있는 길이 나온다. 아까 거기가 그 마을인가? 이 끝에 가면 뭐가 있기는 한거야? 해가 너무 뜨거워 답지않게 얼굴과 팔에 덕지덕지 발라둔 썬크림마저 녹아내린다. 더웠다. 슬슬 열이 받는다.
나는 왜 아까 렌에서 내리지 않았을까? 나는 왜 더 적극적으로 그 역이 어디였는지 확인하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나는 대체 왜 잔거지? 그래, 잘 수는 있지 근데 알람을 맞추는게 어려운 일이였나? 왜 짐들은 락커에라도 맡기지 않았지? 애초에 뭘 하겠다고 유럽에 DSLR씩이나 가져온거지? 로밍이 아까워서 에그를 들고 온건 너무 자린고비 같지않나? 편한 투어상품을 선택할 걸 왜 나댄거지? 이런 상황에서 난 또 뭘 보겠다고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는거지? 수많은 자책과 혼란이 가득한 머리 속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그냥 나에게 너무나 화가 난 상태로 짐으로 꽉 채워진 캐리어를 끌고서는, 그저 왼발 다음 오른발을 내밀어서 걸었다. 너무 덥던 기다란 길을 걷다보니 바다가 나오는 듯하더니만 저 앞에 도개교가 하나 나온다. 어? 하는 와중에 갑작스레 도개교 너머 멀리에서 인기척이라고 해야할지, 뭔가가 있는 느낌이 난다. 그야말로 갑자기 커다란 요새 같은 성벽이 다가왔다. Saint-Malo다.
생말로는 정말로 거대했고 안에는 다 어디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당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앞부터 유명한 빵집에 길게 줄이 서있다. 17년 여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검색해도 거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수준이였던 생말로는, 알고보니 해적의도시로 꽤나 유명했고 걸어 온 길이 한적했던게 의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물어보니 관광객들을 위해 해안가를 따라서 역과 생말로를 오가는 버스가 있었다). 다 둘러보기엔 시간이 모자를 정도라 결국 절반 이상은 보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그런 모자름에 감사하고 흡족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새로운 기분으로 돌아올 곳을 남겨두었다. 이 다음에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오겠노라며, 근사한 목표가 생겼다면서. 그런 생각으로 잠시 둘러보기를 마치고 미슐랭 별이 달린 식당에서 만족스런 생선요리를 먹고는 다시 역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생각보다 5시간쯤 늦게 도착하게 된 몽생미셸은 남는 시간에 원하는 걸 모두 볼 정도의 크기였고, 야경까지 딱 좋게 즐기고는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계획대로 5시간쯤 일찍 왔더라면 남아도는 시간을 호텔에서 핸드폰으로 떼웠겠구나 싶을 정도로 더 이상의 시간이 완벽하게 불필요했다. 침대에 누워서 정말로 흐뭇해 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결론적으로 실패 덕분에 완벽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요즘의 나는 나의 선택이나 실수가 얼만큼이나 더 뼈져리게 아파질지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지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어떤 결말을 꿈꾸고 있는지도 도대체 모르겠다. 다만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그 때 그 생말로를 향하던 길이였으면 한다. 순간의 실수로 걷게 되어버린 그 때 그 길은 썬크림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더웠고 작은 벌레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지만, 계획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고 큰 마음 먹고 나선 길은 생각보다 길고 끝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심지어는 그 길 끝에 뭐가 있는지조차 조금도 가늠이 안되었지만… 다시 도착할 그 길의 끝자락에서 나는 결국 상상도 못했던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바라볼테고 그 때의 약속처럼 미처 보지못했던 생말로 바다의 붉은 석양을 맞이할 것이다.
이 길이 그렇게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그 때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