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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Feb 08. 2024

활공

이번 활공 대회는 역대급으로 많은 무리들이 모였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처음엔 동시에 많은 무리들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상금으로 성충 20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빠질 순 없지. 물론 나도 출전했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도전하는 대회이다. 포와 한도 열심히 준비 중이었다. 나는 25라운드 만에 포와 한은 각각 27라운드, 30라운드 만에 탈락했다. 성충이 아니라 레몬이 상금이었다면 의지가 더 불타올랐을 것이다. 물론 탈락했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었다. 급 커브 기술은 내가 최고니까. 물론 급커브 기술 대회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최고라고 말해도 알 도리가 없지. 

초미의 관심사는 역시 루의 경기이다. 루가 경기를 치를 때마다 관중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경기를 끝내고 온 나와 한과 포도 어느새 루의 경기를 따라다녔다. 루는 78라운드까지 여유 있게 이겼고 이후로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역시 루! 대단한 체력입니다! 이번에도 우승컵을 거머쥘까요?”


 사회자의 목소리가 고조됨에 따라 관중들은 한껏 들썩였다. 

“이건 날개의 힘만 있어서 될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온몸에 힘을 빼야 가능한 이야기죠.”

“아 그렇습니까? 어떻게 반대의 이야기가 가능한 거죠?”

“장거리 비행에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에너지 조절이 관건인데요. 아무래도 힘 조절을 탁월하게 한 루 선수가 지금까지 지치지 않는 비결 같습니다!”


사회자들의 루에 대한 칭송이 이어지면서 나의 심기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루가 잘하는 것을 정말이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향긋한 온기가 전해져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옆자리엔 초가 앉아 있었다. 나는 일순간 기분이 좋아져 헛기침이 나왔다. 


“아… 안녕. 초.”

“안녕 탄, 한, 포.”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앞 발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는 그런 나의 앞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 흔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녀가 흔드는 앞발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동시에 그녀의 붉은 눈 위로 뻗어 있는 더듬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고 나는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에잇. 아름다운 초의 얼굴을 구경하는 게 더 낫겠다. 나는 그녀 몰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가 눈치챘을 수도 있다.) 사과나무 열매처럼 붉은 주홍빛의 눈, 꼬리로 갈수록 짙어지는 갈색 피부 이따금씩 무지개 빛을 반사시키는 비단결 같은 날개 건강한 더듬이는 내가 본 초파리들 중에 최고였다. 나는 그녀를 보는 나의 모습이 들키지 않으려고 경기를 진행하는 선수에게 중간중간 와! 잘한다! 그렇지!라는 추임새도 빠지지 않게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 할 땐 ‘나는 너를 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보고 있었다.)’를 확인시켜 주려고 경기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는가 하면 괜히 떨어진 물건은 없는지 앞 뒤로 살펴보곤 했다. 나의 심장은 뜨거워졌고 나도 모르게 날개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사실 몇 시간 전 나는 초와 데이트인지 아닌지 모를 것을 했었다. 데이트라 하기에는 그녀의 마음을 너무 모르겠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달달했다. 


“너도.. 루의 경기 보러 왔니?”나는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아니 그냥 놀러 왔어. 무리들이 다 여기 있는 것 같아서.”

“루… 말이야. 비행 멋있지?”

나는 그녀의 마음을 떠 보았다. 순식간에 고르고 고른 제일 중요한 질문이었다. 

“난 활공이 왜 멋있는지 잘 모르겠어. 친구들이 보니까 나도 구경하긴 하지만.”


‘예스!’

나는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나의 초는 루의 가슴팍을 보고 소리 지르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랐다. 역시 나의 여신이었다. 


“루의 경기를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곧 루의 경기가 시작되!”


한이 눈치 없는 말을 했다. 내 더듬이가 독을 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초가 한 말을 믿는다. 활공 따위 멋있지 않다는 그 말.


“네에! 다음입니다. 드디어 준결승전! 루와 치의 대결이군요!”


치는 처음 본 초파리이지만 최소 연령이며 최 단기로 성장한 미래가 촉망받는 선수였다. 


띵!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비행이 시작 됐다. 치는 생각보다 노련했다. 작은 몸이지만 단단해 보였다. 1라운드는 치의 승리였다. 심상치 않은 수군거림과 환호성이 들렸다. 모두들 새로운 영웅이 등장할 것만 같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건 루의 평안한 표정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갑기도 하고 온화하기도 한 그 표정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이 게임과 그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의 태도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치의 도전이 개의치 않다는 듯 물 한 방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짝대었다.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 것처럼 차분히. 2라운드도 뒤이어 연달아진 루의 입장에서는 초조할 법도 한데 말이다. 


띵!

3라운드는 달랐다. 치는 1, 2라운드때처럼 여전히 초반 스피드를 앞서 기록했지만 마지막 결승점을 몇 센티 앞두고 루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4라운드. 4라운드 때 치는 처음부터 체력의 부진을 보여줬고 루의 압승이었다. 치는 그동안 보아왔던 루의 기세에 밀리지 않는 듯 보였지만 역시나 경험이 훨씬 많은 루의 체력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사회자들은 치의 체력 안배의 실패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루의 노련미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루는 치에 ‘어린애야 이제 그만 집에 가렴.’이라고 농락하듯 마지막 라운드에서 그의 비행을 여유 있게 이겨 버렸다. 


이제 다른 날파리와 결승전을 눈앞에 둔 루는 누구든지 덤빌 테면 덤벼봐라라며 양다리로 허리를 짚고 가슴을 내밀었다. 


‘지랄.’


“캬…. 진짜 멋있다 루!”

포와 한이 앞다투어 소리 질렀다. 

“탄, 괜찮아?”

초의 아름다운 목소리.

“어… 왜?”

“눈에 살기가 느껴지네.”

“하하... 어?”

그녀는 두 더듬이로 루가하고 있는 경기장 쪽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하… 아니야. 살기라니!” 

“대결해 보고 싶어?”

“글쎄. 루는 활공 말고 다른 건 나한테 다 안 되는 애거든. 이… 이거라도 잘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앗차.. 이런 말은 괜히 했나. 에잇 몰라.

“하하하.”

초의 맑은 웃음은 나를 안심시켰다. 맞다 살기 맞았다. 나는 루를 싫어했다. 활공을 잘하는 것도 잘난 맛을 자기 자신이 아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결승전이 시작되자 더 많은 무리들이 한 경기를 둘러싸 구경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도 역시 미리 와서 자리를 잡았다. 속으로는 루의 패배를 기도했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루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이제 한 경기만 끝나면 루는 스타가 되어 있을 것이다. 


탕!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탕탕!


아니다. 경기 시작의 소리보다 날카롭고 묵직했다. 


탕탕탕!


그렇다 경고성이 짙은 경직된 소리. 이건 식물의 줄기가 부러지는 경고의 소리였다. 저 멀리서 온몸이 짙은 순찰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달음에 날아와 나를 발견하고는 급 착륙을 멋지게 해냈다. 순찰대 중 리더로 보이는 이가 내 앞에 서서 예의를 갖춘 다음 긴장된 얼굴로 말하기 시작하자 나도 덩달아 날개를 쭉 피었다. 


“탄.”


“탄!  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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