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이상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내가 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칼 로저스(Cart Rogers)
한 번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쥐와 인간의 차이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내용은 그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이다.
만약 당신이 배고픈 쥐를 다섯 개의 터널로 둘러싸인 판의 가운데 놓고 치즈를 세 번째 터널 밑에 숨겨 두었다면, 쥐는 치즈 냄새를 맡고 치즈를 찾을 때까지 터널을 탐색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다음 날 똑같은 쥐를 똑같은 장소에 둔다면 쥐는 훌륭한 공간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세 번째 터널로 갈 것이다.
만약 그 사이에 당신이 치즈를 다섯 번째 터널로 옮겨 놓았다면, 쥐는 예전에 있었던 곳에서 치즈를 발견할 것을 예상하면서 여전히 세 번째 터널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쥐와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쥐는 현실적이기 때문에 곧 치즈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치즈를 찾기 위해 다른 터널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인간은 계속 세 번째 터널로 가는데, 세 번째 터널이 치즈가 있어야 하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몇 세대를 지나면서 세 번째 터널에 대한 관습, 철학 및 종교를 개발하고, 세 번째 터널을 다스리기 위해 신을 창조하며, 나머지 네 개의 터널에 살고 있는 악마를 만들어 낸다.
쥐의 단순한 뇌는 실패를 직면했을 때 과거의 믿음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간의 뇌는 신념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고수하는 데 능숙하다. 우리의 뇌는 이런 신념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을 유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구해 내도록 할 필요있다.(453-454 쪽)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의 그것보다 정교하고 복잡하게 진화되어 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생물들이 생존에 적합하게 생체 기관들을 전문화하고 특성화한 반면에 인간의 신체 기관은 오히려 비전문화의 길로 진화했다.
사람은 조류보다 날기에 부적합하고, 어류보다 헤엄치고 잠수하기에 부적합하며, 심지어 긴팔원숭이보다 나무를 못 타며 치타보다 빠르게 달릴 수 없다. 대부분의 생명체가 생존 환경에 적절한 기관들로 전문화된 반면에 적신(벌거숭이)으로 진화한 인간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뇌의 진화를 제외하면 인간의 신체는 퇴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털이 없기에 옷과 불이 필요하고 맨손이 연약하기에 살만한 굴을 팔 수 없는 이유로 자연의 큰 굴을 찾거나 견고한 집을 지어야만 한다.
뇌의 진화는 문명과 종교를 발명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다수의 인간의 노동을 착취하고 인격을 사물화 하며 소외를 심화시켰다. 두뇌는 창작의 원천이지만 망상 덩어리기도 하다. 인간은 생각은 온통 염려와 불안 그리고 걱정으로 가득 차있다. 저자가 말하듯이 전통적인 신념체계가 아닌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구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의 마음을 협력자로 바꾸기
신체는 움직임을 통해 이득을 얻으며, 마음은 고요함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사룡미팜(Sakyong Mipham)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인데,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내장과 방광은 자신의 존재가 있음을 우리가 알아차리게 해 주지만 우리의 마음은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존재를 알게 해 주는 반사는 없으며, 만약 우리가 마음의 존재를 무시한다고 해도 어떤 압력이나 죄책감이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기억나게 하는 것에는 노력과 원칙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사용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고사하고 자신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혹시라도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는 첫 번째 일들 중의 하나는 마음은 혼자서 계속 생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잠깐동안 생각의 흐름이 차단되는 것 같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곧 끊임없는 말, 생각 및 이미지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은 생각이 흘러갈 때 이들 생각을 동일시하거나 반응하지 않으면서 이들 생각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을 만들기를 원한다. 그래서 목표는 이런 생각이 지나가고, 그다음 생각에 의해 대체되고, 또 그다음 생각에 의해 대체되는 것을 내버려 두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생각의 강물은 생각이 당신이 아니며, 당신은 생각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어떤 노력이나 의도도 없이 계속 흘러갈 것이다.
이런 생각과 감정의 흐름에서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우게 되면, 당신은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당신은 이런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정확하고 유용한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게 되고 이들을 믿을지 말지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뇌가 잠재적인 위험을 다루기 위해 진화하는 동안에 만들어진 생각의 속도, 강도 및 부정적인 편향 모두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겉질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너무 똑똑해져서 이제 우리의 안녕을 위협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뇌가 100억 년의 시간을 통해 진화했지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한순간에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이 발생하는 데는 수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만약 이런 순간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마음은 새로운 존재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461-462 쪽)
요즘 일반화된 명상을 통한 치유는 생각의 급류를 완만하게 하거나 단순화시키는 자기 성찰 혹은 내적 직관의 한 방법이다. 인도의 여러 명상법이나 불교의 남방선 혹은 북방선 그리고 가톨릭의 묵상이나 기도 등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심리 요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이 우리의 뇌 안에서 작동하는 과학적 원리와 어떻게 상호 관련을 맺는지는 최근에 발견되고 또 탐구되고 있다. 엉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단순화함으로써 병든 정신의 치유에 도움이 되는 여러 신체적 혹은 심리적 요법이 시행되고 또한 여러 방식의 약물/상담 치유법이 임상실험을 거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제안하는 가설들 중 하나는 ‘우리의 복잡한 뇌가 진화의 결과물이 아니라 흔히 실존주의자들이 이야기하듯이 전락(轉落)의 필연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최상위 포식자로 자리 잡은 현생인류의 뇌는 하나의 신비가 아니라 핵폭탄의 뇌관이다.
집단지성의 산물인 AI나 매타버스는 인간의 사물화와 수치화의 산물이다. 도대체 인간이 수리나 계산과 기호로 환원될 수 있다면 미래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의 상징인 인격이나 인권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마음의 변화는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방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자는 다음의 글로 책의 말미를 맺는다. “인간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우리는 스스로와의 깊은 관계를 키워가면서 다른 사람과 연결을 통해서 변화한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 안에서, 우주 안에서 인간의 고유한 위치는 어디일까? 어디에서 우리 뇌는 엉클어진 생각을 정리하고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존재하는실재의 신비를 찬미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