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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Mar 23. 2022

막차는 과연 떠났을까?

하루하루가 절박한 이유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핸드폰을 무선 전화기로만 사용하던 20년 전 얘기다. 하루라도 술을 안 마시면 뭔가 속이 헛헛해서 '이런 게 알코올 중독인가' 걱정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 택시비는 없으니 매일 밤 막차와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차라리 지하철은 낫다. 막차가 통과하면 셔터를 내려버리니까, 포기가 빠르다. 문제는 버스다. 지금에야 스마트폰도 있고 정류장에 전광판도 있지만 그때는 철제 표지판에 딱 3가지 정보만 적혀 있었다. 


(예시)

첫차시간 05:30

막차시간 23:30

배차간격 4~7분


  한 잔 더 하고 가라는 둥, 동방(동아리방)이나 과방에서 자고 가라는 둥 나의 간을 욕심내는 '악의 무리'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 23시 30분. 정류장에 쓰여 있는 막차 시간과 똑같다. 나는 막차를 포기해야 할까 기다려야 할까.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기만 하면 갑자기 두 가지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강의실에서는 1도 하지 않았던 '고민'이라는 것이 한밤 중 버스정류장에서 밀려온다.


'결심' 이휘재 선생. 이걸 TV에서 보셨다면 최소 80년대생입니다



막차는 끊겼을까?


  '막차가 틀림없이 온다'는 보장만 있다면 30분이든 1시간이든 기다리면 된다. 문제는, 어디 하나 확실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23:30이라고 나와 있는 막차시간은 차고지 출발 기준일 수도, 이 정류장 도착 기준일 수도 있다. 또 4~7분이라고 적혀 있는 배차간격은 변화무쌍한 서울 도로에서는 3~8분이 될 수도, 2~9분이 될 수도, 1~10분이 될 수도 있다. 


  데이터가 부족하면 인간은 경험칙(經驗則)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에라도 기대야 한다. 하릴없이 정류장 간판만 쳐다보던 그때 불현듯 나와 같은 동네에 사는 동기 2명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 저번에 개강파티 마치고 밤 12시에 정류장 갔는데 막차가 딱 그때 왔더라고. 시내 야간 시위가 있어서 한참 걸리셨대" (A양)
"동아리 술자리 끝나고 11시 20분쯤 갔는데 이미 막차가 떠났더라. 새벽 1시까지 기다렸는데도 안 와서 동방에서 잤어"(B군)


  통계적으로 따지면 둘 다 정규분포의 가능성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불확실한 상태에선 먼저 막차를 기다려봤던 사람들의 말은 빛이요 소금이다. 아니, 그거 말곤 기댈 곳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시간과의 싸움


  왜 갑자기 20년 전 이야기를 꺼내냐고? 난임 전투를 치르고 있는 우리 부부의 상황이 지금 딱 저렇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이 막차를 기다리는 심정 말이다. 


  여성은 태어날 때 평생 쓸 난자를 한 번에 가지고 나온다. 100만 개쯤 된다. 아무리 몸에 좋은 걸 먹어도 단 1개도 더 늘어나지는 않는다. 난자는 사춘기 때 30만 개로 줄어들고 폐경이 되는 50세 무렵에는 1천 개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그래서 시험관 시술을 하는 난임 부부들은 하루하루가 절박하다. 지난달보다는 이번 달이, 이번 달보다는 다음 달이 더 불리하다. 매달 생리를 통해 난자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항뮐러관호르몬(Anti-Mullerian Hormone, AMH) 수치가 낮은 난저의 경우 마음이 더 급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보다 난자 소멸 속도가 훨씬 더 빠른 탓이다. 아내는 가끔 알탕을 먹으면서 농담조로 이렇게 말한다.


내 난자가 이렇게 많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럼 AMH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그건 또 아니다. 누군가는 AMH가 0.1이어도 임신이 된다. 또 다른 누군가는 AMH가 높은데도 임신이 안 된다. 마치 A양은 밤 12시에 왔는데도 막차를 타고 무사히 집에 가고, B군은 밤 11시 20분에도 막차를 놓치듯 말이다. 


누구는 임신이 되고 누구는 안 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불확실한 게 AMH 뿐인가? 자연 임신이 죽어도 안 되던 부부가 시험관 시술에 돌입하자마자 딱 한 번 만에 성공하고, 반대로 시험관 시술을 10차례 넘게 실패한 부부가 갑자기 자연 임신으로 아이를 갖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수치가 정상인데도 끝내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로봇이 수술을 하고, 또 돼지 심장을 사람 몸에 이식할 만큼(결국 2개월 만에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의료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생명의 잉태를 다루는 생식 분야는 이처럼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대단히 많다. 인간이 인간을 탄생시키는 이 신비로운 과정에 대해어쩌면 신은 애초부터 인간에게 모든 걸 알려줄 생각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신이 원망스러워도, 기댈 건 신밖에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아가야 할 때 사람은 더 간절해진다.(앞선 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니까' 참조) 


  난임 3년차가 시작된 2022년 1월 1일. 우리는 양양 낙산사에서 소원지를 적었다. 아내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① 소원지는 두 사람 모두 쓴다. 한 사람 소원만 이뤄질 가능성을 대비하자는 취지다.
② 소원은 딱 하나씩만 쓴다. 그래야 정성을 갸륵히 여겨 들어주실 거란 의미다.


자리가 없어서 아내와 나의 소원지를 두 곳에 나눠 달았다(영상)


오늘도 막차를 기다린다


  사실 막차가 영영 오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세상에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 다만 내가 그런 상황을 떠올렸다는 것 자체가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직은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져서 잘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까짓 거 막차가 오지 않으면 어떤가. 꼭 버스를 타야 하나, 밤새 걸어서 집에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샛별이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첫차를 타면 또 어떤가.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는, 또 어떤 친구보다도 잘 맞는 훌륭한 단짝이 옆에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은 막차를 기다린다. 뭔가를 기다리는 일을 멈추기 힘든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거창한 이유를 다 떠나서) 단지 '기다린 게 아까워서'이기도 하지 않은가. 이미 2년을 통째로 기다렸고 이제 3년차다.


-  하루에도 몇 번씩 날아오는 비수 같은 질문 "애는?"

-  생각 없이 던지는 값싼 조언 "마음 편하게 가져~"

-  난임부부 5명 중 4명이 못 받는 허무한 정부 지원까지..


  난임부부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계속 막차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난임부부 생존기>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새 연재 <일상의 인상>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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