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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Mar 12. 2022

두 번째 이별은 조금 더 아프다

아내의 다급한 전화

오빠.. 전화받을 수 있어?


  작년 11월의 어느 날 오후 3시 50분. 갑자기 휴대폰 화면이 번쩍하며 밝아졌다. 아내의 전화였다. 구성안을 막 넘기고 잠시 한숨을 돌릴 때였다. 원래 회사에 있을 때는 전화를 잘 안 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일까.


  그날 아침 아내는 평소처럼 분홍색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감고 집을 나섰다. 게다가 우린 불과 2시간 전까지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우자며 카톡창을 웃음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 뒤돌아서 핸드폰 화면의 전화기 아이콘을 오른쪽으로 미는 데까지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어 그럼~"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미안해.. 내가 지키지 못했어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뻔했다. 아내의 설명은 이랬다. 회사에 있는데 피 비침이 좀 심해서 급하게 반차를 내고 병원에 갔, 그때만 해도 초음파상으로 아기집이 보였다고 했다. 오히려 의사 선생님이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임신 초기 소량의 피 비침은 있을 수 있어요."라며 안심을 시켰다고 한다.


  문제는 진료실을 나온 직후였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병원 화장실을 한 번 더 가게 됐는데, 뭔가가 아래로 '' 하고 빠져나갔다는 거다. 그리고 다시 찾은 진료실. 초음파 화면에는 더 이상 아기집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얘기한 뒤 아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내의 울음소리는 내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어쩐지.. 아내는 2시간 전부터 카톡을 읽지 않고 있었다. 내가 쓴 마지막 문장은 "우리 햅삐(새로운 태명) 잘 키워봅시다!"였다. 답이 없던 그 2시간 동안 아내는 갑자기 쏟아진 피를 보고 두려움에 휩싸여 병원으로 달려갔을 것이고, 진료실에서 잠시 안도했다가 화장실에서 또 한 번의 하혈 후 어쩔 줄 몰라했을 것이다. 옆에 남편도 없이, 공포로 가득 찼을 아내의 큰 눈망울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아내는 분홍색 임산부 배지를 새로 받았던 지난 주말부터 피가 살짝 비친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상황 닥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앞선 글 '나도 임밍아웃을 해봤다 참조)


  내 회사생활 사상 첫 조퇴다. "사실 아내가 임신 6주차인데요. 지금 아기가 잘못된 것 같다고 전화가 와서요" 부장은 두 아이의 엄마다. 금세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얼른 가라고 했다. 내가 지금 엄청나게 불운한 사람이 돼 있다는 걸 실감했다. 앞자리 선배한테도 사정을 얘기하고 내가 하고 있던 일의 마무리를 부탁했다. 불과 며칠 전 내게 "임신 축하한다"고 했던 그 선배다.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난 회사 사규집을 찾기 시작했다. 지난주만 해도 출산 휴가를 검색하기 위해 들어갔던 곳인데, 이제는 출산 휴가 바로 아래 줄에 있는 유산 휴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배우자가 유산을 하면 휴일 포함 5일을 쉴 수 있다고 돼 있었다. 첫 번째 유산 때도 물론 힘들었지만 그때는 휴가를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두 번째 유산은 충격이 훨씬 컸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다짐했다. 아내를 보고 울지 않겠다고. 거듭된 착상 실패, 유산, 난관 제거 수술까지, 수많은 질곡이 있었지만 나는 아내 앞에서만큼은 눈물을 감춰왔다. 나까지 무너지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다잡았다.


거짓말처럼 사라진 우리 아가


 불 꺼진 침실, 아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분명히 있었거든 오빠. 몇 분 만에 어떻게, 그 사이에 사라질 수가 있지?"


  나는 아내를 조용히 안아줬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나는 고작 위로밖에 해줄 수가 없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우리는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찰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병원에 갔다. 얼마 전만 해도 피검 수치가 높아지길 기도했는데, 이제는 그 반대다. 얼른 0으로 떨어져야 아내 몸에 을 대지 않을 수 있다.(앞선 글 '우리 아가 안녕? 안녕.." 참조)


  병원 원장님은 "엄마 잘못 때문에 아이가 떠난 게 아니에요. 원래 약한 배아였던 거니까 절대로 자책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내에게 아직도 더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지난주 임신 확인서를 받았던 원무과에 가서 유산 확인서를 발급받았다.


유산 확인서. 원인도 모르고 우리는 두 번째 아이를 떠나보냈다



도망치듯 서울을


  병원을 나선 뒤 우리는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난관 제거 수술 후 제주도에 갔던 것처럼, 그야말로 도망치듯 강원도로 떠났다.


  양양 낙산사에서 해수관음상을 바라보며 빌고, 강릉 송라사에서 맷돌을 돌리며 또 빌고(맷돌이 돌아가지 않아야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주문진 아들바위에서 바위를 어루만지며 빌었다. 안반데기에서는 별이 쏟아지기를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린 뒤 빌었다.


  를 얼른 점지해달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우리 기도는 오직 하나였다.


  "우리 곁을 떠난 아가가 좋은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


강릉 안반데기에서 찍은 별들


  나의 유산 휴가 마지막 날 밤, 나는 휴대폰에서 행복의 흔적을 쫓기듯 지웠다. 산모 수첩 사진을 지우면 화면에 아기집 초음파 사진이 튀어나왔고, 그걸 또 지우면 임신 확인서가 나타났다. 가슴에 가시가 하나씩 콕콕 박히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지우기가 고통스러웠던 사진은 지하철 역무실 앞에서  사진이었다. 아내는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묶은 채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내 빨간색 끈 임산부 배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지하철역에서 분홍색 끈 배지새로 받은 직후 내가 찍어준 사진이었다. 아내나 나나 부모가 될 생각에 가장 가슴이 벅차올랐던 때였다.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나는 결국 휴지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곧바로 휴지통을 비웠다. 다시는 되살릴 수 없도록.


임산부 배지는 쓸 일이 있기를 바라며 남겨뒀다


  "회사 돌아가면 다들 뭐라고 하려나. 임신했다고 괜히 말했나.."


  며칠 뒤 아내도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가 동굴에서 나와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까지는 그로부터 한 달 정도가 더 걸렸다. 피검 수치는 다행히 0으로 떨어졌다. 호떡이와 마찬가지로 이 녀석도 효심이 지극했던 모양이다. 효자(子)인지 효녀(女)인지는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지만 말이다.


  그렇게 연말이 찾아왔다. 우리가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던 2021년 새해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그리고 수술까지.. 1년간 많이 아팠고 많이 슬펐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 사랑은 더 단단해졌다.


  우리는 2021년을 맞을 때의 그 간절함으로 2022년을 맞닥뜨리고 있었다.


  2020년, 2021년, 그리고 2022년. 우리는 여전히 난임부부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새 연재 <일상의 인상>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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