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말씀에 아내는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무더웠던 작년 여름, 유산의 원인을 찾기 위해 두 달 만에 찾은 난임 병원이었다. 진단명은 난관수종. 나팔관이라고도 부르는 난관의 끝부분이 막혀서 물이 차오르는 질환이다. 이 액체가 자궁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호떡이가 잘못된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나팔관 조영술(방사선 조영제를 넣어 난관이 막혔는지 확인하는 검사) 결과를 보니 실제로 한쪽 나팔관으로는 조영제가 거의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해결 방법은 복강경 수술로 난관을 절제하는 것이었다. 첫 임신을 유산으로 끝낸 충격을 아직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이제 나팔관까지 잘라야 한다니. 아내는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 "자기야.. 그래도 난임 원인 하나가 제거되는 거야."
아내) "너무 무서워..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거잖아"
우리 난임 생활은 왜 점점 더 힘들어지는 걸까
다행히 수술 날짜는 빨리 잡혔다. 입원 전날 퇴근길에 나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들렀다. 당분간 병원 밥을 먹어야 하니까 입원 전 마지막 식사는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로 준비해주고 싶었다. 이제 나흘간 집을 떠나 병원에서 살아야 한다.
보호자가 되다
입원하자마자 보호자 출입증이라고 적힌 손바닥만 한 플라스틱 명찰을 받았다. 난생처음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었다. 느낌이 야릇하다. 어딜 가든 병원 안에선 명찰을 목에 걸어야 했는데 보호자라는 단어의 묵직함 때문인지 은근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내는 흰 병원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아내가 수술을 앞둔 환자라는 게좀 실감 난다.
보호자는 환자의 불침번이다. 환자 침대 바로 옆에 보호자 침대가 있다 보니 환자를 깨우려면 보호자를 먼저 깨워야 한다.
새벽 5시에는 혈압 체크가 이뤄지고, 다시 눈 좀 붙일라치면 2시간 뒤아침 식사가 들어온다. 보호자 침대는 내 몸과 오차가 거의 없는 크기였다. 의자 겸 침대이다 보니 쿠션은 겨울 패딩보다도 얇았다.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하지만 아내의 고통에 비하면 발톱의 때도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아내의 당부
"오빠 이걸 꼭 외워야 해"
아내가 내민 휴대폰 메모장에는 큰 글씨로 세 문장이 쓰여 있었다.
1) 오른쪽 난관은 살려주세요 2) 난소를 지켜주세요 3) 저 아이 가져야 해요
수술 당일 자신이 의식이 없을 때 대신 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하면서 휴대폰을 아내에게 되돌려줬다. 하지만 속으로는 뭔가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아내가 외우라고 한 세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어서다.
1) 양쪽 난관을 모두 절제해도 시험관 시술에는 영향이 없지만, 자연 임신은 힘들어진다.
2) 아내는 난소 수치가 낮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난소를 건드리면 안 된다.
3) 제발.. 최선을 다해서 수술해주세요.
아내는 신발을 두고 갔다
수술 당일 오전 8시쯤 아내와 수술실로 향했다.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를 밀어주는 분이 계셔서 나는 그 옆을 졸졸 따라갔다. 여름이었지만 병원 안은 서늘했다. 수술실로 다가갈수록 우리가 느끼는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아내의 손을 꽉 잡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수술 잘 받고 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꼭 난소를 지켜달라고 이야기해줘"
"누구한테?"
"그냥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든"
아내는 저 문으로 사라져 갔다
아내가 없는 쓸쓸한 병실로 올라갔다. 침대 아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내의 까만색 슬리퍼였다. 수술실에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없다. 모두 침대에 실려서 들어간다. 그렇다 보니 환자가 수술받는 동안 병실에는 신발만 남아 주인을 기다린다. 아내 신발을 보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병실을 나섰다.
병실을 나와서 왼쪽으로 돌아보니 분만실이다. 아내가 입원 첫날 "병실 바로 옆이 분만실이네, 좋은 기운을 받자"며 두 팔을 벌렸던 장면이 떠올랐다. 결국 못 참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른쪽 난관은 살았을까
이제 수술실에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릴 차례다. 전날 전공의 선생님은 수술 내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수술 도중 절제한 난관을 보호자에게 보여줄 거라고 했다. 준비가 되면 전화를 할 테니 그때 수술실로 내려오라고 했다. 다만, 난관을 하나만 절제할지, 두쪽 다 제거할지는 일단 수술을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02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수술실 앞에서 수술복을 입은 의사를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공의 선생님이 들고 나온 플라스틱 통에는 새끼손가락 크기쯤 되는, 관 모양의 형제가 물에 잠겨 있었다. 다행이었다. 딱 한 개였다. 오른쪽 난관은 살아있다.
전공의 선생님은 "수술이 잘 됐다"고 했다.(물론 집도는 교수님이 하셨다)하지만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이다 보니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병실로 이동한다는 병원 문자를 받고 나서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병실로 돌아온 아내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모습에 또 한 번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는 이틀 뒤 집으로 돌아왔다.
떠나요 둘이서
그다음 주말 우리는 제주로 떠났다. 복강경 수술의 여파로 아내는 수영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너덜너덜 누더기가 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사려니숲의 신록은 웅장했다
여름 제주는 특히 아름다웠다. 바다는 파랬고 숲은 우거졌다. 햇살은 따듯했다.
무엇보다 아내의 활짝 웃는 모습을 참 오랜만에 본 것이 제주 여행의 큰 수확이었다.
유산으로 끝난 첫 임신, 그리고 나팔관 절제까지..
2020년 초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가 처음 난임 병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버거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