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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Mar 05. 2022

우리 아가 안녕? 안녕...

첫 임신 그리고 유산



  "틱" 스위치 켜는 소리와 함께 방문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스윽스윽 욕실 슬리퍼 끄는 소리, 그리고 살포시 문 닫는 소리가 나의 귓바퀴로 수렴했다.


  지금 시간은 새벽 5시. 아내는 내가 자고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아내가 이불 밖으로 슬금슬금 나갈 때 이미 눈을 떴다. 나 역시 긴장이 되어 밤새 뒤척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려온 건,

"찌익" 포장지 뜯는 소리, 그리고 물 내려가는 소리.

또 한 번 포장지를 뜯는 소리, 다시 한번 물 내려가는 소리.


딱 이런 느낌이었다


  다시 한번 "틱" 소리가 나면서 방문 틈 불빛이 자취를 감추던 찰나, 나는 급하게 눈을 감았다. 어느새 침대로 올라온 아내는 내 왼쪽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오빠 오빠 일어나 봐"

  "으음? 지금 몇 시야?"

  "오빠 이거 두 줄 맞지?"


  아내가 내민 건 얇고 긴 플라스틱 조각 2개. 임신 테스트기였다. 2개 모두 세로로 빨간색 줄이 그어 있었다. 아내의 몸에 뭔가가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우리 부부는 눈곱도 떼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2021년 어느 봄날의 새벽, 1년 반이나 이어진 난임 생활이 드디어 종착역에 다다랐다.


드디어 난임 졸업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는 병원으로 향했다. 시험관 시술을 3차례 하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임테기 두 줄.


  "아직 안심은 일러. 피검사 수치를 봐야 해" 


  병원에 가는 차 안에서 아내는 거듭 나를 진정시켰지만, 나도 아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1차 피검 수치는 20이었다. 10 이 넘으면 착상 된 상태이긴 하지만 임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통상 1차 피검에서 정상 임신이라고 보는 최소 수치는 100이다.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또 하나의 모래성이 파도에 휩쓸려갔다.['모래성을 쌓는 심정'에 대해서는 앞선 글(3화) 참조]


  사실 실패가 너무 익숙해져서, 실망감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다. 이 점이 더 슬펐다.


  나흘 만에 또 찾아간 병원. 차 안의 공기는 나흘 전과 사뭇 달랐다. 이제 우리는 피검 수치가 0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다음 차수를 무리 없이 시작할 수 있어서다. 계속 애매한 수치가 나오면 자궁 외 임신을 걱정해야 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피검 수치가 20에서 300으로 15배 뛴 것이다.



태명 짓기를 망설인 이유


  태명이 필요했던 직접적인 이유는 아내의 카톡방 때문이었다. 난임 동지들이 모인 카톡방인데 임신이 되면 '임부방'으로 옮기는 게 관행이다.

 

  그런데 '임부방'에서는 서로를 별명이 아닌 '00이 엄마'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도 태명이 있어야 했다.

(동지 카톡방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자세히 쓸 예정이다.)


  사실 우리에겐 태명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었다. 라온이 때문이다. 시험관 초기, 우리는 수정된 배아를 배아 친구라는 우스꽝스러운 애칭으로 불렀다. 아직 형태도 없는데 태명을 짓는 건 성급하다고 생각했었다.


"배아 친구야 힘을 내라!"(아내가 초음파 사진을 보며)
"배아 친구 잘 있니?" (내가 아내 배를 쓰다듬으며)
하는 식이었다.


  그러던 2021년 초, 내가 "아기사자 꿈을 꿨다"고 입방정을 떤 바람에, 당시 이식한 배아 친구에게 라온이라는 태명을 처음으로 지어줬다.


이렇게 생긴 아기사자가 꿈에 나왔었다


  결과는 실패였다. 라온이는 엄마 몸에 제대로 붙어있지 못하고 곧바로 우리 곁을 떠났다.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도 태명 짓기를 망설인 것이었다.


라온이 생각하면 조심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또 빨리 자기 이름을 불러줘야
안 떠날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우리는 고심 끝에 태명을 지어주기로 결정했다. 이번에는 피검 수치라는 분명한 '근거'가 있지 않느냐며, 호떡이로 부르기로 했다.


호랑이의 해인 2022년생일테니까 '호'
엄마 몸에 떡처럼 딱 붙어있으라고 '떡'
그래서 호떡이다



호떡이가 만들어낸 기적


  아내는 태명을 지은 뒤 얼굴이 부쩍 밝아졌다.

"호떡이가 태명이 생긴 뒤로 힘을 내고 있는 것 같아"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태명을 짓고 나흘 뒤 실시한 3차 피검 결과는 무려 1,000. 2차 수치(300)에서 3배가 또 뛰었다. 난임 병원 원장님은 배아가 잘 자라고 있다며

"사흘 뒤에 아기집을 보면 되겠네요."라고 했다.


  네 자릿수의 피검 수치, 그리고 아기집. 지금까지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것들이다. 4차 피검을 기다리며 난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내 인생에 언젠가 찾아올 행운이 있다면 이번에 가불(假拂) 받고 싶다"



짧은 만남 그리고..


  4차 피검 날,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원장님은 "초음파부터 볼까요?"라고 했다. 선생님과 아내는 바로 옆 커튼이 쳐 있는 초음파실로 들어갔고, 진료실에는 나만 남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떨려왔다.


  그리고 커튼 너머로 들려온 원장님의 당황한 목소리.


어? 왜 아기집이 안 보이지?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내 바로 앞에서 건물이 무너져도 이 정도로 가슴이 내려앉지는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아내는 피검 전날부터 불안해했다. 계속 출혈이 있다고 했다. 최대한 일찍 퇴근하고 집에 달려갔더니 아내는 멍하게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아내는 나한테 기대며 눈물을 흘렸다.


  "무서워.."


  그날 밤 아내가 제대로 소리 내어 말한 유일한 문장이었다.



'기록'은 의미가 없다


  호떡이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지 1주일 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엄마 몸 덜 힘들게 하려고 스르르 빠져나갔다.


  효자()였을지 효녀()였을지는 알 길이 없지만, 효심이 극진한 녀석임에는 분명했다. (배아가 자연 배출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시험관 시술 1년 반 만에 처음 착상에 성공했고, 피검 수치가 2배 이상 뛰는 더블링(doubling)도 경험했다. 이 정도만 해도 큰 수확이라고 자위해보지만,


  시험관 시술은 기록 경쟁을 하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만출(娩出) 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기록이라도, 아니 오히려 좋은 기록일수록, 더 큰 실망으로 돌아온다.


시험관 시술에서 '좋은 기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4차 시술은 이렇게 끝났다.


  실패가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지금까지 느꼈던 3차례의 실패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음이 너무 쓰라렸다. 마치 내 안에 뭔가가 갈기갈기 찢지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수많은 임테기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메모장 맨 위에 이렇게 적었다.


  "호떡이, 꼭 다시 와요!"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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